딸 애가 100일이 되었을 때 백일 잔치를 했다. 요즘은 결혼식 때 처럼 전문 업체에 맡겨서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집에서 음식 장만하고 손님들을 받았다. 마당에서 음식을 하다 보니 파리들이 새카많게 몰려왔다. 음식 냄새를 맡고 촌동네 파리들이 다 몰려든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아내 쪽은 병원 사람들이 많이들 왔었고, 내 쪽은 돌아가신 임석진 선생과 최종욱 선생, 그리고 막 시작한 한철연 회원들이 많이 와 주었다. 집이 완전 북적거려 사람사는 것 같았다. 집에 외부 사람들이 오는 경우가 드문 요즘과는 전혀 달랐다.
겨울에 통일로 군부대를 따라서 함께 산책을 하곤 했다. 솜 장갑을 끼고 털모자 까지 써서 추운 줄을 모르는 아이가 아주 좋아했다. 그 길을 조금 더 따라가다 보면 오른 쪽에 삼송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껑충 뛰어나니고 그네도 타고 뺑뺑이도 돌리면서 잘 놀았다. 아내와 나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 보았다. 비로소 나도 가정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시절 방황을 많이 했을 때 결혼은 나에게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나를 받아줘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며준 아내에게 고마움도 느꼈다.
삼송리 집에서 비교적 잘 지냈는데 어느날 원당에 살던 그 집 장남이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서 방을 내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 대신 구석진 마당에 방 한 칸 짜리 슬라브 가건물을 지어 주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올 때는 천정이 새기도 했고, 무엇보다 외부에서 보는 미관이 좋지 않아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상당히 불만스러웠지만 당장 대비 책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다. 하루는 창밖으로 북적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밖을 내다 보니까 그 당시 유명한 드라마 '전원일기'를 찍고 있었다. 농촌 드라마에 어울리는 집이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집 앞에 '일용 엄니' 역을 맡고 있던 김수미씨가 털버덕 주저 앉아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본 김수미 배우는 생각보다 조그마한 모습이다.
이 동네가 좋고 주인 집 할머니도 좋았지만 더는 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대학원 후배의 도움을 받아 새로 살 집을 찾아 보았다. 마침 통일로 건너편 오금리 쪽으로 가다 보니 옛날 기와집인데 마당이 아주 넓은 집이 보였다. 통일로에서 숲으로 가득찬 오른 쪽 언덕길을 한 참 올라가다 보면 아래 쪽에 마을이 보인다. 개천이 있고,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100여 메타 정도 가다 보면 왼편에 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세 가구가 살았는데 가운데 큰 유리 창이 보기 좋은 곳이 우리가 이사갈 집이라 바로 결정했다. 이사는 당시 출강하던 대학의 학생들이 도움을 줘서 어렵지 않게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이 많아 이사하기 힘들었지만 그 당시는 책이 많은 것이 자랑스러운 때라 학생들도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지금은 학생들과 말도 잘 섞지 않지만 그 당시는 사제지간이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이곳은 마당이 아주 넓어서 선후배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서 음주가무를 많이 즐겼다. 지금은 은퇴한 모 교수는 대학에서 임용되기 전에 수시로 이곳에 술 마시러 놀러온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들 사이에 영향력이 있었던 내가 임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사회생활을 끝내고 대학에 돌아 오려 할 때 그 대학의 강사를 지내던 후배가 그 선생에게 나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선생 하는 말, "**를 뭐하러 만나냐?" 한 마디로 별 볼일 없어졌다는 이야기인데, 세상 인심이 다 그렇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정신현상학> 강독 모임도 가졌는데 매주 몇 몇 학생들이 꼬박 꼬박 찾아왔다. 이 팀 출신의 한 멤버는 현재 중견 철학자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다른 멤버는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가서 학위를 따고 현재 모 지방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한철연의 후배들도 이곳으로 찾아와서 술을 마시곤 했다. 마당이 넓다 보니 마음도 넓어지는 느낌들을 가졌다.
이 집 앞에는 자그마한 개천이 흘렀다. 물이 깨끗해서 오리도 여러 마리 헤엄쳐 다니고, 여름 날에는 아이들도 물장구 치며 놀았다. 개천 너머에는 배나무밭이 있어서 봄날에는 하얀 배꽃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토질이 안 좋아서 그런지 배 맛은 별로였다. 개천 위에는 빨간 다리가 있어서 우리는 그 다리를 '퐁뇌프의 연인들'에 나오는 '미라보의 다리'라고 불렀다. 여름 날 밤에는 그 다리 위에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별도 보고 했다. 아이가 너 댓살 될 때 였다. 여름 날 더울 때는 아이스케끼를 사다가 냉장고에 재여 놓고 하나씩 빼먹는 맛이 그만이다. 그럴 때 아이한테 돈을 쥐어주고 사오라고 하면 아이가 심부름을 잘했다.
그집 한 쪽에는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사셨고, 다른 쪽에는 우리보다 몇 년 정도 나이 많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에는 우리 애보다 한 살 어린 건강한 사내 아이와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이쁘장한 여학생이 있었다. 남률이라고 부른 이 아이는 전형적인 농촌 애 였는데, 여름 날 햇볕에 그을린 모습이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아이가 꼭 마당에서 엉덩이를 까고 *을 싸는데 단 한 줄로 길게 싸곤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 애가 내 딸을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딸 아이는 말을 잘해서 동네 꼬마들을 데려와서 선생님 놀이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가끔씩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야산으로 올라가 돗자리를 깔아놓고 쉬기도 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유모차를 끌고 2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약수터로 가서 약숫물을 떠다 먹었다. 이곳은 물맛이 좋아 인근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 여름 날 이곳으로 가려면 차가 다니는 신작로를 따라 1.5킬로 정도 가다가 왼편 야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쪽을 한 참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숲이 나오고 그 아래 그늘이 잔뜩 낀 쪽에 약수터가 있었다. 여기서 가져 간 물통 여러 개에 물을 잔뜩 넣은 다음 근처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쉬곤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머리에 햇볕을 피하기 위해 수건을 쓴 아이가 힘이 드는가 보다. '아빠, 나 저 유모차에 타면 안 돼?' 그러면 '왜 안돼? 우리딸' 하면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유모차에 태워서 왔다. 나중에 차를 사서 몰고 왔을 때는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꽤 먼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주기적으로 약수물을 뜨러 다녀온 것 보면 나의 몸 상태도 꽤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30년 후에는 지금 나의 몸 상태가 꽤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