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나는 호기심이 무척 많은 편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바로 파고 들었고, 그 때문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갔다. 내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나중에 대덕의 천문연구원 원장을 지낸 박모 후배의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1980년대 중후반 쯤 그 친구가 술을 마실 때 컴퓨터의 미래에 대해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하길래 귀가 솔깃해진 것이다. 결혼 후 얼마 안 돼서 아내 카드로 마침 컴퓨터 회사를 시작한 후배에게서 AT 286 컴퓨터를 120만원에 덥석 샀다. 이 컴퓨터는 그 이전의 OS Drive와 Application 드라이브 2개로 움직이던 XT 컴퓨터와 달리 OS를 20메가(Giga가 아니다) HDD를 내장한 최신(?) 컴퓨터였다. 모니터는 14인치 짜리 흑백 이었다. 처음 컴퓨터로 커서가 껌뻑 거리는 모습을 볼 때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외계인이 대화를 하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컴퓨터를 구입했을 때 그 컴퓨터 회사에서 직원을 보내 며칠 간 사용법을 학습시켜 주었다. 그는 자주 사용하는 DOS 명령어 몇 개와 당장 필요한 워드 사용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 때 <한글과 컴퓨터> 전 창업주인 이찬진이 개발한 '아래 아 한글' 워드 프로세서를 처음 보았다. 오래 전 상업 학교 다닐 때 타이핑을 쳤고, 그 이후로도 타이프 라이터와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했기 때문에 타이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아래아 한글'을 1주일 만에 마스터했다.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는 타이프 라이터와 달리 한 번 쓴 글이나 오타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이 컴퓨터를 사용해 그 당시 번역을 무진장 했다. 아마도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에서 가장 생산성이 많았던 때가 그 때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는 독일어 원서를 하루에 15 쪽이나 번역하기도 했다.
만일 워드까지만 컴퓨터를 사용했다고 한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은 단순히 워드에 그치지 않았고, 나중에 DOS에서 Apple의 Macintosh를 본따 GUI로 단장한 Windows를 보면서 완전히 뽕 갔다. 컴퓨터에 모뎀을 달아서 통신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그 당시 '하이텔 통신'의 동아리에 드나들면서 게시판에 글도 많이 올렸고, 밤새 대화방에서 낯선 이들과 대화도 많이 나눴다. 밤마다 대화방에 들어가보면 커다란 나무 위에 수많은 새들이 올라타서 짹짹 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삶도 배웠고, 정보도 많이 줏어 들었다. 이 대화방이 킬링 타임 하기에 아주 좋아서 시간도 많이 뺐겼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 끊어 버리고 나온 경험이 있었다. 이 집에 살 때 수시로 용산에 드나들면서 부품들을 구해서 업그레이드도 하고, 컴퓨터 조립하는 방법도 배워서 직접 부품들을 새로 조립하기도 했다. 바로 같은 집에 사는 여고생이 졸업했을 때는 내가 직접 컴퓨터를 조립해주기도 했고, 교육도 시켜 주었다. 나의 이런 실력이 학교에도 소문이 나서 여러 사람들이 오금리 먼 곳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중에는 나중에 지방 대학의 총장이 된 정모 선배, 부총장이 된 김모 선배까지 있었다. 아무튼 나의 젊은 시절에 컴퓨터가 차지한 시간이 많았다. 내가 나중에 이와 연관된 사업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컴퓨터를 가지고 소일을 하다 보니 학위 논문은 전혀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벌써 오래 전에 종합 시험까지 합격했는데 논문을 쓸 분야는 정했지만 제목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때 이렇게 하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위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논문을 쓰기 위해 독일에 2년 정도 유학을 다녀오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아내도 그러라고 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바로 위 돈 잘버는 형에게 도움을 청하니까 바로 No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평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때문이다. 아내는 전세집을 빼서 그 돈으로 가라고 하고, 자기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 집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이미 나는 임석진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독일 대학 10여 곳으로부터 입학 허가서(Zulassung)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고민이 많이 되었다. 어학 학원은 계속 다니면서 어학 공부를 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포기를 했다. 청력도 많이 나빠진 상태에다가 전세금을 빼가지고 유학을 간다는 것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대에게 가는 먼길> 마지막에 나오듯 유학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논문 쓰는 일도 포기하고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나의 '좋은 시절'도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