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 시대 선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20세기의 대표적인 선사 성철은 돈오 이후에 점수가 필요 없다. 돈오돈수(頓悟頓修) 일뿐이라고 비판했다. 한 번 깨달은 후에는 따로 오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점수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고, 점수를 요한다면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돈오냐 점수냐는 불교계에서 해묵은 논쟁이지만 사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이 답이 없어 보인다. 돈오가 옳으니 돈수가 옳으니 하는 논쟁도 경험적으로 쉽게 확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체험을 한 자만이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상자 속의 딱정벌레'의 딜레마에 걸린다. 깨달은 자가 딱정벌레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때문에 이런 문제는 백날을 따져 보아야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서는 것이 속 편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문제를 보는 방식을 바꾼다면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하고, 보는 방식에 따라 상대의 주장이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고, 내 주장이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보느냐에 있지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오는 깨달음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고, 점수는 인식론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존재론적으로 볼 때 깨달음의 본질이나 본체가 있고, 그것을 경험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깨달음의 본질이나 본체가 있고, 그것을 경험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그것이 존재하고 또 확연하게 본 사람의 입장에서 점수를 주장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반면 점수를 인식론적인 개명이자 확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음 단계의 깨달음이 이어질 수가 있다.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했듯,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점수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의 알을 깨는 행위와도 같다. 이런 경험은 인식의 지평이 달라지는 경험이고, 확장되는 경험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점수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이러한 해법은 안티노미와 같은 딜레마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관점과 시각을 달리하면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