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그림을 처음 본 건 대학교 1학년 서양미술사 개론 시간이었다. 법정대학에 다니던 나는 같은 학과 친구들이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위주의 교양과목을 듣는 것과는 달리 혼자서 미대생과 함께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며 교양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수는 이 그림을 그린 구본웅을 서울의 로트렉이며 야수파에 속하는 화풍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소인증이었던 로트렉처럼 꼽추라는 외형을 운명처럼 지게 된 화가. 부유한 집에서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육아를 해주던 유모의 실수로 천형처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갔던 천재화가.
하지만 친구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통해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화가 구본웅보다는 그림 속의 모델이 이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강약과 흑백 대비가 뚜렷한 구본웅의 야수파적 붓 터치는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문 이상의 인상을 실제보다도 더 강렬하게 재현해 내고 있었다.
야외수업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하게 된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도감 속 작품을 원작으로 보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이 문학사상이라는 유명한 문예지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출판사로 넘어갔지만 매년 이상문학상을 시상하는 단체가 문학사상이라는 사실도.
미술과 문학이라는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천재들은 어떻게 만나고 우정을 나누게 되었을까? 나는 이 그림이 그려진 1935년 서울(일제 치하의 경성)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우정에 천착하는 대학교 1학년을 보내게 된다.
이상은 서울공대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지만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할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신명학교에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던 그는 장애를 가져 자신보다 반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구의 구본웅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편견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구본웅을 멀리했지만 이상만은 그의 진가를 알아주었다. 통인동에 살던 이상과 누하동에 살던 구본웅은 집도 가까워 미술과 문학을 매개로 하여 급속하게 친해진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거친 붓놀림으로 시대를 너무 앞서가던 화풍을 가진 구본웅의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상에게 구본웅은 자신이 아끼던 화구 상자를 선물했고 이상은 본명을 버리고 오얏나무로 만든 상자라는 의미의 이상(李箱)을 필명으로 사용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사실 그들이 통하게 된 건 예술만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집안 사정으로 백부에게 입양되었지만 입양 후 백부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백부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상은 본가인 친아버지, 친어머니에게도 애정을 가질 수 없어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게 된다. 그래도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지워진 경제적 책임은 그에게 많은 부담감이 되어 정신적으로 항상 피로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계모와 살게 된 구본웅도 정신적으로 피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애까지 가지게 되어 집안의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것도 정신적 공황을 가져올 정도로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 사정으로 예술만은 마음껏 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가 있었지만 가족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열패감은 이상과 구본웅 두 사람을 끈끈하게 연결하는 운명적 비밀이 되었다.
이상은 항상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비밀을 긍정하였다.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괴상한 시 오감도를 만들어 낸 것만 봐도 이상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물론 이런 특이한 가정사와 정신적 상태 때문에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이상의 시와 소설을 통해서 줄줄이 창작된 것은 우리 문학의 축복이겠지만.
건축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기사로 일하던 이상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으로 각혈을 하며 폐병쟁이의 길, 결핵을 앓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를 위하여 친구 구본웅은 집안에서 운영하던 출판사인 창문사에 그를 취직시켜 주지만 이상은 오래지 않아 직장 생활을 접고 종로에 제비라는 문학 다방을 열며 본격적으로 글쟁이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친구와 같이 갔던 기생집에서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나고 금홍은 제비의 마담이 되어 이상과 관계를 이어나간다. 소설 날개와 봉별기는 금홍과의 연애와 동거가 만들어낸 이상의 소설이다.
그 시기에도 구본웅은 항상 그의 옆에 같이 있었다. 장신이었던 이상과 꼽추 구본웅이 종로거리를 같이 걸으면 사람들이 곡마단이 왔다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의 동행은 기묘한 형상을 나타냈지만 또 묘하게 어울리는 한 쌍의 조합이었다.
자신의 인생과 예술에 숨어있는 열등감, 왜곡된 가족사를 서로 이해해 주고 고통스러운 창작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작품들을 서로 사랑하는 사이. 둘은 서로가 만드는 창작품의 가치를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말 그대로 지음(知音)이었다.
다방 제비의 파산으로 금홍과도 헤어지고 방황하던 이상에게 구본웅은 계모의 동생, 이모를 소개하여 준다. 친구를 법적으로 이모부로 만들어 버린 구본웅. 그리고 계모인 변동숙의 여동생 변동림. 후에 김향안으로 개명하여 화가 김환기와 재혼한 그녀는 문학 천재 이상과 미술 천재 김환기를 모두 거느린 조선의 여걸이었다.
경기여고와 이화 여전을 졸업한 인텔리였던 그녀는 예술을 보는 안목도 뛰어나 이상과 김환기의 천재성을 꽤 뚫어보고 이것들이 발현될 수 있도록 그들의 예술정신에 물을 주며 물심양면으로 내조해 준다.
이상이 일본 유학 중 불령선인으로 동경에서 체포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동경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생명이 위독한 순간, 현해탄을 건너온 부인 변동림에게 이상은 센비키아 과자점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동경 시내를 뒤져 긴자역에 있는 센비키아의 멜론을 구해오지만 이상은 하나도 삼키지 못하고 한 많은 27세 인생을 마치게 된다. 친구 구본웅이 친구의 초상을 그린 1935년에서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7년이었다.
30년도 살지 못한 이상은 하지만 그 후 한국문학에 300년의 업적을 선물한다. 이상문학상이 제정되고 매년 그의 문학적 실험정신이 후배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구본웅은 이상 사후에 해방을 맞이하지만 5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이상과 구본웅은 둘 다 불행한 개인사라는 비용을 치르고 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대가들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가장 비참했던 시간들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이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인생에서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
오늘도 구본웅이 그린 친구의 초상 속 이상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물며 친구에게 말하고 있다.
“친구, 박제된 천재를 아시는가? 이럴 땐 연애조차도 유쾌하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