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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빈손 Sep 17. 2021

락다운 (Lock-down)의 시작

역마살의 화신, 코로나에 갇히다




    모든 것의 시작은 2020년 2월말, 내가 막 짧은 해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사실 그 전부터 역병의 번짐은 뉴스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그랬듯, '설마 뭐 별 일 있겄어?' 싶은 생각에 느긋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며 소소하게는 아폴로 눈병, 크게는 메르스, 사스 등의 사태를 겪어본 지극히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어쩌면 안전불감증에 가까웠을 지 모를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곧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하며, 현실 자각이라는 이름 하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와 이거 진짜 농담이 아니었네?'




    당시의 나는 동남아의 한 개발도상국으로의 주재원 발령을 받아 매일 매일이 한여름인 어느 한 도시에 임시 정착한지 만으로 딱 1년 째 되던 시기였다. 업무 특성상 동남아시아 역내 출장이 밥먹듯 많았던 과거의 나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적어도 한 달에 두 세 번은 무조건 국제선 비행기 (그것도 국적기는 언감생심, 짧은 다리를 제대로 다 펴지도 못할 LCC의 새벽 혹은 자정 노선) 를 타야만 하던 신세였는데 얼마 뒤 예정되어 있던 2년만의 일본 출장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가 되어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그건 막 새 프로젝트가 막 시작되었을 참이었는데, 일 년의 절반 가까이를 출장에 소진해왔던 나는 사실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드디어 집에 있을 수 있다니.




    그 집에서 지낸지 1년이 넘었지만 그 때만해도 막상 집 내부는 입주청소 없이 당장 복덕방에 내놔도 될만큼 생활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의 내게 집이란 고속도로의 휴게소 정도의 느낌으로 정말 잠만 자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컷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종종 들어와 필요한 생필품들을 리필하고, 급한 볼일을 보고 다시 스쳐지날 그런 곳. 생활의 중심이 이미 틀어져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어도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생활이 계속 되면서 심신이 지쳐있었다. 그런데 재택 근무라니! 더이상 짐을 싸고 풀고의 무의미한 일련의 행동은 필요 없어질테고, 내가 다음주 주말 어디에 있을 지 몰라 약속을 못잡을 일도 없을테고, 장기 출장에서 돌아와보니 정말 드물게 사귀었던 마음맞는 친구가 먼저 한국에 돌아가버려 나혼자 남아있을 일도 없을테고, 취미생활도 뭐든 비싼 일회권 따위 살 일도 없을테다!




     단순무식하게도 그저 부루마불 같은 삶의 청산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기나긴 '타의에 의한 정착'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고,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무고한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 제한될지도 모르고. 대한민국 헌법 아래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교육을 받고 자란 20대 청년이 하는 경험에서 우러난 예측이란, 잡지 마지막 장에 나오는 별자리 운세보다도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걸 그 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굳이 눈 돌아가게 변하는 주식차트까지 보지 않아도, 인간은 정말 한 치 앞의 삶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한 인생 터닝 포인트의 시작이었다.




    비록 부모님은 천주교시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꼭 사주를 보러가시곤 했다.  먼저 별자리 운세 어쩌구를 운운한 이상, 대소사마다 역술인을 찾아간다는 이 이야기가 매우 이상하게 들리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여섯 명의 자매, 그러니까 내게는 여섯 이모들이 계셨는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시는 이모들의 데이터 베이스는 가히 어마어마했으므로, 그 때 그 때 방방곡곡의 용하다는 사주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따라 그 해 운세를 점치곤 했다. 별자리 운세를 믿지 않는 나지만 매해 엄마와 이모들이 대신 보러 가주는 사주만은 꼭 믿었는데, 대개는 어딜가나 나의 사주는 탄탄대로이고, 가만히 둬도 혼자 무성해지는 열대의 식물같이 대기만성하여 열매를 맺으리라는 장밋빛 이야기만 듣고 왔기 때문이다. 가끔 가다 몇 월부터 몇 월까지는 차를 조심해라, 사기를 조심해라 정도의 믿어서 손해볼 것 하나 없는 주의사항 몇 가지가 끼어드는 정도여서 피곤한 인생에서 몰래 품고 사는 로또 용지처럼, 매년 듣는 장밋빛 전망은 피곤한 내 인생에서 나는 언젠가 꼭 잘 되고 말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기에 딱 좋은 연료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대기만성하리라는 덕담말고 꼭 듣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 사주에는 이른바 '역마'가 제대로 끼어있어 어디 한 군데 정착하는 삶은 못살거라는 이야기였다. 이 역마는 내가 스물 후반에 접어들 즈음 사라진다고 했는데, 정말 스물 성인이 되자마자 자의 반 타의 반 나는 여러 나라를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나에겐 1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징크스가 있었는데, 6개월 이상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사는 나라를 옮겨야 할 일이 꼭 생기곤 했다는 거다. 어쩌다보니 대학을 해외로 가게 되었고, 대학 다닐 때는 꼬박 꼬박 방학을 핑계로 6개월에 한 번씩은 방학 때마다 바다를 건너 한국에 돌아갔지만, 첫 직장에 입사를 하고 일에 치이는 바람에 6개월 넘게 비행기를 타지 못했었다. 그러자 회사에선 갑자기 나를 급하게 출장보낼 일이 생기게 되었고,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대로 주저앉아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반 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거 말고도 불행인지 뭔지 모를 역마의 장난에 지친 삶을 그냥 한 줄로 말해보자면 난 주변에서 역마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한 군데 자의건 타의건 붙어있지 못하는 삶을 살아오게 됐다는 것인데, 거짓말처럼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 대재앙과 다름없는 코로나가 터졌다. 지구를 비롯한 세상이 날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알만큼의 나이는 먹었지만, 종종 인생의 필연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구구절절 아무도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내 과거사를 끄집어내 줄줄이 나열한 이유는 그냥 내가 앞으로 쓸 이야기가 역마에 시달리던 이십대 직장인이 락다운 때문에 연고도 없고 겨울도 없는 열대의 한 나라에 묶여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 살기위해 시도해본 여러 평범하고도 괴상한 방법에 대한 후기 공유 정도의 글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집이라는 공간에 나 홀로 갇혀, 총합 반 년이라는 시간을 고군분투해온 그런 경험론적이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 역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락다운의 그늘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지만, 집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멍때리던 그 때의 나는 지나간 페이지로서 어느정도는 극복했다는 가끔은 꼴보기 싫을 자기자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집에서 어떤 난리부르스를 췄는지, 공개처형 되는 기분이라 미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세상의 모든 락다운에서 개인의 자유를 속박당하는 모두에게, 라떼는 말야-와 같은 新꼰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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