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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당 Oct 02. 2021

어떤 잔상

“나는 이제 엄마가 없다. 너는 엄마한테 잘 해 드려라.”

  66세에, 96세 엄마를 여읜 시어머니의 말씀이시다. 할머니가 되면 감정도 함께 늙고 쪼그라들어 많이 기쁘지도 많이 슬프지도 않겠지, 30대까지도 이렇게 생각했다. 인생의 담담한 진실 앞에서 어리석은 예측은 빗나갔다. 늙어지지 않는 것이 있구나. 늙어 가는 외피 안에 그대로 보존되다 되려 테두리는 또렷해지는 젊은 시절의 감정이 그것이구나. 100세가 다 된 엄마가 돌아가셔도 똑같이 슬프고 막막하고 하늘 아래 고아가 되어 한없이 처량해진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나는 우리 엄마가 100살까지 사실 줄 알았다.”

  호상이었다. 작년 초까지도 혼자서 살림을 꾸려나가실 정도로 정신도 육체도 또렷하셨다. 작년 여름 즈음 허리 통증으로 입원하셨다가 치료 후 요양원으로 옮겨 5개월여를 지내셨다. 촛농 위 자그마해진 심지가 서서히 옆으로 넘어져 겨우 남은 불꽃이 사그라지듯 서서히 식음을 전폐하고 의식을 놓으신 채로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하지만 100세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신 엄마의 영정을 보는 딸에게 호상은 없다. 더 나누지 못한 손길과 눈길과 음성과 채취가 두고두고 그리울, 어린 마음을 가진 노년의 딸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은 없다.


  “엄마가 내 손에 5천원을 쥐어주더라.”

  지난 여름 할머님은 수시로 딸들을 호출하셨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도 불편하다, 심심하다,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 70세 전후의 네 딸은 엄마를 보러 바지런히 시골집을 오갔다. 저녁이면 할 일이 없어 매번 화투를 치셨다지. 수십 년 다져온 실력들이라 서로가 호적수이고 판돈 앞에서는 자매라고 봐주는 법이 없으셨다지. 그날 시어머니는 불운을 뒤집어쓰고 부아가 슬슬 치밀어 올라 언니들 앞에서 화투판을 엎어버리고 할머님 방에 가서 씩씩대셨다지. 가만히 보던 할머님은 서랍에서 돈봉투를 꺼내 가만히 5천원을 쥐어주셨다 한다. “화내지 말고 이 돈 갖고 가서 언니들이랑 화해하고 다시 화투 치고 놀거라.” 10대 자매 넷이서 지지고 콩콩대다 동생은 울고 불며 이르고, 엄마는 자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며 동생을 놀린 언니들에게 눈을 흘기는, 투닥대지만 살가운 풍경은 수십 년을 날아가서도 똑같이 재현되는구나. 엄마의 마음은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 죽는 날까지 녹슬지 않는구나. 차마 녹슬 수가 없구나.


  “엄마가 마지막까지 자식들 용돈 주고 가셨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 할머님은 딸들에게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골고루 나눠주셨다. 몇 안 되는 금반지, 팔찌, 시계 등.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함을 아는 슬프고도 선명한 판단. 시계를 받은 시어머니는 엄마의 유품이구나 만지고 또 만지셨다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모인 6남매는 조의금을 정산했는데 2천만 원이 남았었다 한다. 누나들은 남동생 둘이 나눠가지라 하고, 남동생들은 말도 안 된다며 서로 돈봉투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졌다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었겠다. 6남매는 모두가 흡족할 지혜로운 정산을 마쳤고, 2백만 원을 받아 든 시어머니는 엄마가 준 마지막 용돈을 보며, 엄마가 우리를 이렇게 착하게 키워주셨네 하며, 이제는 없는 엄마가 왈칵 보고 싶으셨다 한다.


  어떤 죽음이든 모두 슬프다. 물질로는 흔적도 없는 거짓말 같은 사라짐. 하지만 죽음이 남기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잔상들이 있다. “손부야, 너거 시어무이한테 잘해서 참 고맙데이.” 할머님은, 내가 당신의 딸에게 잘해 주어서 고맙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어제 눈이 내려 다시금 눈밭이다. 내일이면 사라질 그 눈밭 사이사이로 어떤 잔상이 곱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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