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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n 13. 2024

힘내요, '밀러' 양!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7권 <<상징과 리비도>> 중 <과거사> <창조주의 찬가> <나방의 노래>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이 부분들은 '프랑크 밀러(가명)'라는 어느 젊은 여성이 정신분열병을 앓기 직전, 여행 중 기록한 시와 환상, 그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기록한 글을 읽은 융이 쓴 분석적 주석이다. 밀러는 자신과 체험과 환상을 세 부분으로 정리해서 출간했고, 그에 따라 융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녀의 환상을 해석한다.


*


(밀러의 첫 번째 기록 요약)


아주 짧은 순간에 다른 이들의 느낌과 감각이 너무 생생하게 내게 밀려와 마치 나 자신의 것처럼 느껴진다. 또 어떤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끼면 마치 그 사건에 나 자신이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가령 [시라노]에서 크리스티안이 칼을 맞는 장면에서는 내 가슴이 찔리는 듯한 완전한 고통을 느꼈다. 이와 같은 암시는 때로 유별난 형태를 띤다. 아름다운 증기선의 사진을 보고도 기계의 쿵쿵거림과 파도의 출렁임을 감지한 적이 있다. 또 샤워 후 머리에 수건을 두른 내 모습에서, 어이없게도 고대 이집트인들의 머리장식을 떠올렸다.


또 최근 유명한 예술가가 내 출판물의 삽화를 그리고자 했다.  나는 그에게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제네바 호수 같은 풍경화를 그리게 할 수 있었다. 그 예술가가 말하기를 그가 자기의 연필을 사용하듯, 내가 그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진기한 체험들은 마치 무지개가 푸른 하늘과 구분되듯이, 익숙하고 일상적인 흐름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


(첫 번째 기록에 대한 융의 주석)


언뜻 보기에, 그저 감수성이 예민하고 공감력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밀러의 기록에 대한 융의 주석은 좀 매정하다.

 

"미스 밀러는 여기서 다른 사람에 대한 그녀의 거의 마술적인 영향을 강조하려는 무언의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한 욕구 역시 진정한 감정관계를 맺는 데 자주 실패한 사람이 주로 느끼는 내면의 절박함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럴 때 거의 마술적이라 할 정도의 자신의 암시능력을 상상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그러나 융이 왜 이런 매정한 해석을 하는지, 따지고 보면 또 이해가 되기도 한다. 감수성 예민한 밀러 양의 공감 대상은 주로 연극이나 풍경이다. 서로 간에 친밀한 상호작용을 할 수(필요가) 없는, 단지 밀러 양의 감상과 감정 상태를 일방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게다가 다른 예술가를-그 역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개성이 넘치는 사람일 텐데- 단지 단순한 도구로 사용한 건, 밀러 양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융에 따르면 이러한 기록을 할 때의 밀러는, 너무 내면세계에만 집중해 있는 상태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중심을 되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치우침 뒤에는 또다시 반대 방향으로의 치우침이 일어난다. 융의 주석대로, 다음 기록에서 밀러는 외부세계의 (사소한?) 인상에 의해 압도된다.


*


(밀러의 두 번째 기록 요약)


(배로) 여행 중에 나는 사람들과의 교제조차 피하고 외딴곳에서 나만의 몽상에 잠겼다. 그러나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나는 (유럽인) 승무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한 (이탈리아) 장교가 갑판에서 불침번을 서며 밤새 노래를 불러서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나는 그 가락에 어울릴 만한 가사를 써야겠다는 착상이 떠올랐다.


나폴리 항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거기에서 회복된 뒤, 나는 이탈리아 장교들의 아름다움과 거지들의 흉측함에 대한 생각을 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꿈속에서, '샛별들이 함께 노래할 때'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고 그것은 창조에 대한 관념과 우주에 울려 퍼진 장엄한 합창의 서곡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밀턴의 <<실낙원>>과 어딘가 유사성을 띠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어렴풋하게 떠올려지는 꿈속의 단어들로 첫 번째 시를 썼다. 그 몇 달 후,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 다시 이 꿈이 떠올라 시의 두 번째 판을 완성했다. (시는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연은 소리의 신에 대한, 두 번째 연은 빛의 신에 대한, 마지막 연은 사랑의 신에 대한, 찬미들이다.)


*


(두 번째 환상에 대한 융의 주석)


여기서 융은 밀러 양의 무의식적인 억압에 대해 탐지한다. 꿈을 설명한 '실낙원'이라는 말로부터, 그가 "무엇인가 잃었다는 감정과 사탄의 유혹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융은 설명한다. '실낙원'이란 누구나 알다시피, 낙원에서 뱀이 여자를 유혹했고 여자는 또다시 남자를 유혹해서, 인간은 영원한 낙원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융에 따르면, 밀러는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욕망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유혹을 물리쳤다.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의지적 결정을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억압 행위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억압은 불법적인 해소 방법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것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억압된 갈등이 어떻게 되겠는가? 주체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갈등은 분명 계속 존재한다....'활성화된' 무의식 내용은 항상 곧바로 투사된다.... 투사의 이점은 고통스러운 갈등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 일종의 자기기만의 술책은 이미 존재하는 어려움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다시 말해 그러한 것의 존재를 벗어버리고자 재주를 부리는 부당한 목적을 지닌다."


밀러가 뿌리 친 유혹은 대체 무엇일까? 짐작하겠지만, 그건 바로 여행 중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준 '노래 잘 부르던 이탈리아 장교'다. 만약 프로이트라면, 그녀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성적 욕망의 근원인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의) 기억에 대해서 줄줄 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융 선생은, 그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모든 심리적인 것은 하위적인 의미와 상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일 우리가 미스 밀러가 겪은 그 불면의 밤의 흥분을 오로지 편협한 의미의 성적인 문제로만 돌리려 든다면, 그녀 고유의 정신적 특성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두 의미 중 하나일 뿐이며 더욱이 하위적인 절반의 특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절반이란 실제적인 창조를 대신하는 관념적 창조를 말한다."


밀러는 밤에 노래하던 장교에게서 분명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쩌면 그 젊고 노래도 잘하는 이탈리아 장교에게 매혹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매혹된다면, 물론 그건 단지 성적인 욕망일 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론 누군가가 나를 매혹시킨다는 건, 그가 나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내 안의 가능성의 싹에 물을 주거나, 숨은 열정에 불을 붙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가 맞는지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밀러처럼, 타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면서 그로부터 자신이 받은 느낌을 억압한다면, 정말로 영영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리비도라 불리는 활성화된 정신적 에너지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쉴 새 없이 일한다. 만약 우리가 리비도의 대상을 의식화하지 못한다 해도, 무의식은 계속 작업하면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 환상을 창출하고 그리하여 '심리학적인 수수께끼'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노래하던 장교가 밀러 양 안의 신적 창조성의 대체물인지, 아니면 밀러가 지어낸 '창조주에 대한 찬가'가 매혹적인 장교의 대체물인지, 대체 누가 명확히 알겠는가. 다만, 확실한 건 의식화되지 못하고 억압된 리비도는 그와 유사한 상징적 대상들을 향해 계속 이동해 다닌다는 것뿐이다. ('성적'인 것이라는 말도 실상 그 자체로, 문학적 신학적 종교적 등등, 수많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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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의 세 번째 기록 요약)


이번에는 열차 여행길. 너무 피곤하고 끔찍하게 더운 여성 객실에서 잠을 자던 도중, 한 마리의 나방이 열차의 창유리 사이로 깜박이는 빛을 향해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거의 잠들 무렵 한 토막의 시가 떠올랐다. (태양을 향한 나방, 난 그대를 그리워했네... 나와 같은 무리가 자주 생명을 버린다네... 단 한 번의 황홀한 눈길을 붙들 수 있다면, 난 만족스럽게 죽어가리라. )


이전 겨울에 나는 어떤 철학 논문에서, "별을 향해 나는 나방의 열망, 신을 향한 인간의 동일한 정열적 열망"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이 내 시속에 다시 등장한 것임이 틀림없다. 또 내 시는 바이런의 다음의 시와 리듬 상 커다란 유사성이 존재한다. (내가 믿음 안에 살았으니 이제 나를 죽게 하오!)


*


(세 번째 환상에 대한 융의 주석)


앞에서 열정적으로 신들을 찬양하던 밀러 양은, 이젠 어쩐 일인지 '한 마리의 나방처럼' 죽기를 원한다. 융에 따르면 그것은 욕망의 체념 뒤에 뒤따라오는, 죽음의 환상이다.  

 

"삶의 모험에 대한 신경증 환자의 주저함이 위험한 싸움에 얽혀들지 않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 있으려는 소망에서 나온 것임은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몸소 체험하려는 모험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그런 모험에의 욕망을 질식시킴으로써 일종의 부분적 자살을 자행하는 셈이 된다. "


밀러 양은 왜 이탈리아 장교에 대한 매혹을 억압했을까? 열정은 아름답고 생산적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의 상태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에 불안과 위험에 대한 느낌을 동반한다. 융에 따르면, 밀러 양은 장교를 통해 발견한 자기 안의 열정에 대해 탐구하고 실험해 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안전하게 멀고 먼 별과 창조주 신에 대한 찬미로 리비도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도달할 수 없는 빛-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한 마리 나방으로 만들어버렸다. 


"별에 대한 나방의 동경은, 별이 하늘 높이 떠 있다고 해서 순수하진 않다. 그것은 결코, 그렇게 고상한 희망에 이를 만큼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마리 나방의 욕망이다....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신적인 것까지도 타락한 열정 속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신적인 것을 지향하며 그 자신이 높여진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인간성을 저버린다. "


*


눈에 보이는 일을 할 때도 결과만 놓고 따지기 보다, 일의 진행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성찰하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융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내면적인 면에서도 갈구의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이 충동적, 강박적으로, 거리낌 없이, 무절제하게, 탐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관능적으로 진행되거나, 아니면 이성적이고, 사려 깊고, 절도 있고, 조화롭게 조정되어, 윤리적이고 깊은 성찰로 진행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밀러 양은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신을 찬양하고, 시를 짓고, 철학의 어떤 구절을 기억하는 등 매우 성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성찰 안에는, 자기가 쏙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의 심적 에너지는 마치 널을 뛰듯, 자기도 의식할 수 없는 순간에 불쑥 시와 환상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밀러 양은 자기를 성찰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가까이에서 자신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버렸다.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불러 올, 온갖 '지지고 볶아야 할' '사소하거나 혹은 천박하거나 혹은 상처받을' 일들에 마주할 용기와 힘이 부족하기에 말이다. 


이런 밀러 양이, 옛날 옛적 어딘가 먼 곳에 살던 어떤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렇게 얼굴도 모르는 어느 밀러 양의 이야기를 몇 날 며칠 붙들고 결국 글로 변환시킨 바로 내 안에, 그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밀러 양, 함께 힘을 키우고 용기를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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