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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거야 Mar 16. 2023

각자의 미인

각자의 미인

 냉장고가 처음 집으로 들어오던 날, 나는 그 커다란 물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냉장고를 구경하기 위해 자꾸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정화, 냉장고 생겨서 좋겠네.”라고 말해주는 아주머니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냉장고가 생긴 것이 왜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좋았던 것은 자기네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들과 커다란 냉장고를 싸고 배달된 박스를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마당에 나가 냉장고 박스 안으로 들어가 데구루루 굴렀다. 우리가 구르면 냉장고 박스도 우리와 함께 굴러다녔고 그것이 재미있어서 우리는 깔깔거렸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들 중에는 우리 집과 담 하나를 두고 살고 있는 길호도 있었다. 울고 떼를 쓸 때마다 자기 엄마에게 혼이 나는 아이였다. 엄마와 함께 길호 집에 놀러 갔다가 길호가 혼날 짓을 하는 바람에 놀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길호는 일단 심통이 나면 성질을 부리다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울어버렸다. 그러면 나는 딱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길호에게 어떤 우월감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다. 나름의 근거로는 나는 길호처럼 엄마에게 혼나지 않는다는 점, 길호보다 깔끔하다는 점, 길호보다 옷을 잘 입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엄마는 길호의 엄마보다 예뻤다. 내가 보기에 길호의 엄마는 얼굴이 까무잡잡했고 눈이 작았고 머리카락이 짧았다. 검은 피부와 작은 눈과 무엇보다 짧고 빳빳한 머리카락은 나에게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그나마 남겨진 모든 점수를 잃게 만들었다. 나는 예쁘지 않은 엄마와 사는 길호가 안타까웠다. 그에 반해 우리 엄마는 눈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머리카락도 곱슬곱슬하니 얼마나 예쁜가. 나는 늘 텔레비전에 엄마가 나오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자들만큼 우리 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왜 탤런트가 안 된 거야?”하는 질문을 받을 적마다 엄마는 부끄러워 손사래를 치고는 했다. 


 언젠가 나는 심각한 마음이 들어 길호에게 질문했다. 내 나름으로도 민감한 질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약간은 돌려서 말했다. “길호야, 너는 우리 친구들 엄마 중에 누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나는 질문하면서 속으로 친구들의 엄마를 하나씩 떠올려 보고 나의 엄마를 지목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길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응, 우리 엄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충격받았던 것 같다. 길호의 말에 당황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처음에 나는 길호가 자존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호의 얼굴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길호가 경솔하고 분별이 없는 아이인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길호가 경솔한 근거는 또 있었다. 우리 집의 대문을 지나면 길호네 집 대문이었고 길호네 집의 끝에서 윤희네 집까지 그 사이에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는 공터가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그렇게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 곳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런 공터에서 불장난을 하던 오후에 길호는 내 옆에 있었다. 아마 동네의 어느 어른이 쓰레기를 태우다가 불씨가 꺼져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들어가 버렸는데 아이들이 장난으로 불씨를 살려내다가 점점 커졌던 모양이었다. 길호는 어디선가 막대기 하나를 가져와 불씨를 막대기에 옮겨 붙이고 흔들어 댔다. 그렇게 아이들은 불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규칙 없이 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나는 혹시 엄마의 눈에 띄어 혼이 날까 봐 연신 두리번거렸다. 불장난은 엄마가 신신당부한 금기였던 것이다. 나는 불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아슬아슬하게 흔들어 대던 길호의 막대기가 문득 내 손등에 닿았다. 나의 왼쪽 검지 손가락이 시작되는 손등 부위가 따끔거리면서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울 때 어디선가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엄마는 두부 바가지에 들어 있던 물을 내 손에 뿌려 주었다. 마침 엄마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슈퍼에서 두부를 사가지고 오던 참이었던 것이다. 저만치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는 아주머니들 손에는 모두 두부 바가지 하나씩이 들려 있었다. 놀라기는 엄마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혼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엄마와 아빠는 노심초사하여 나를 돌봐주었다. 퇴근하여 돌아온 아빠는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 화상연고를 가지고 왔고 엄마는 몇 번이나 아픈지를 확인하면서 잠이 드는 내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사실 나는 저녁때가 되자 더 이상 아프지 않았는데 엄마, 아빠가 온통 내게만 신경을 써주는 바람에 사실 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들의 염려스러운 얼굴이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사랑받는 공주님처럼 가만히 누워서 그들의 애정 어린 눈길을 만끽했다. 이럴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이렇게 나를 사랑해 줄 때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나에게 그들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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