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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목 Jul 03. 2023

Asteroid City

영화 내내 간헐적으로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감독은 주인공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모두, 인식과 인식의 사이에서 온다.


나에게 Asteroid City를 한 줄로 설명하라 하면, "뉴런들이 (대체로) 웅성거리는 소리"라고 답하겠다. 가령, 우리가 경험과 학습에 의해 아는 것이 있고, 외부의 자극이 있다고 가정하자. 감지된 자극은 뇌내에서 전기신호로 현현하고, 그 "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뉴런들은 손을 뻗는다.


영화는 한 극작가의 머릿속에 위치하며, 또한 영화 속 무대 위에 위치하며, 또한 스크린 속의 세상에 위치하며, 또한 우리의 머릿속에 위치한다. 그 사이 모든 공간들은 영화 내내, 떨림으로 나타나며 그 떨림은 우리가 "미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는 증명이다. 그것을 상상력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 시적허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컨대, 주인공의 아내는 3주 전에 죽었어야만 했다. 아이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큰아들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세 딸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마가 살아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아내의 죽음은 인지의 영역 안에 있다. 세 딸아이들에게 그것은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지는 핵폭탄과 같은 외부의 자극이다. 큰아들에게 그것은 인식과 인식 사이, 상상력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처럼, 영화 내내 미지를 향하는 떨림에는 시간축이라는 추가 변수가 "주파수"로 나타난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비슷한 얼굴과 어깨를 한 할아버지-아버지-아이를 일렬로 세워놓는 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앞선 한 줄 평에서, 뉴런이 "대체로" 웅성거리는 소리라 한 이유는, 영화 막바지에 벌어지는 난장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들에서 나는 외부 자극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사람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오만 잡생각들과, 또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이해하려 드는 뉴런들의 끈질김을 의인화한다면 대강 저런 느낌이 아닐까. 더 이상은 스포가 될 테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특기할 만한 부분은 그러한 끈질김들을 감독이 특정 연령대의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피로함"으로 색칠해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는 파편화된 "앎"의 영역들이 점점 최적화가 되면서 외부 자극이 들어왔을 때 외삽해야 하는 거리는 반대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학습된 인식의 범위는 넓어지지만 도리어 알 수 없는 것들은 무한의 너머로 도망가는, 마치 별들이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는 것만 같은 이 우주적 혼란(cosmic bewilderness) 속에서, 종군기자로, 여배우로, 천문학자로 오랜 시간을 보낸 등장인물들이 침울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런가 하면, 미지를 앞에 두고 앎의 영역으로 어떻게든 회귀하려는 학교 선생님이나 "몬태나" 같은 경우도 있다. 특히나 학교 선생님의 경우에, 미지는 아이들의 입을 빌려 끊임 없이 선생님을 자극한다. 그러면 일상의 카페트 아래로 애써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쓸어넣는 학교 선생님은 사시나무 떨듯 떨곤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몬태나"가 있다. 미지를 향해 끊임 없이 손을 뻗는 이들의 피로함과는 달리, 그 낯설음과 거대함에 짓눌려버리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존재양식이 있다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독, 그의 신작에 대해 우리는 얘기하는 중이고, 그렇다면 색채와 템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는, 그 활용에 대해). 극중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밝고 아기자기한 배경에서 너무나 경쾌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외부자극의 본질에 기인한다. 칠흑 같고 무한히 뻗어있는 것 같은 미지들 사이에서 새로운 외부자극과 그에 따르는 상상들은 총천연색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우주현상을 보려고 박스를 뒤집어썼던 사람들이 본 네 개의 원들에, 어느 순간 하나의 초록색 원 하나가 이어지는 것이 이와 같다. 무대와 그 뒤는 우리가 학습한 영역이며 자극에 대비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 공간은 흑백으로 비춰지며 시야가 좁고, 어딜 가든 침울하다. 그러나 새로운 자극이 떨어지는 무대 위는 사건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미지의 영역이며 자극에 대응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 공간은 총천연색으로 채워져 있다. 카메라 워킹은 끊임없이 앵글을 바꾸며 시야를 확보하고, 그래서 무대 위는 경쾌하다.


이러한 외삽의 과정들은 앞서 말했듯 등장인물들의 연령대에 따라 다른 분위기로 나타나지만, 그들은 결국 같은 의문들을 품게 된다: 우리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학습한 영역(무대 뒤, 우리의 현실)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공상 속(무대 위, 우리의 상상)에 있는가?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우리들은 자고 있는가? 아니면 깨어 있는가? 그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과연 미지를 향해 손을 뻗어도 되는가? 이대로도 우리의 존재양식은 좋은가? 도대체 왜 우리는 이 흑백영화 속에서도 미지를 향해 끊임 없이 손을 뻗는가? 그리고 내 메시지를 받아줄 뉴런(혹은 외부의 존재)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뉴런과 뉴런 사이, 별과 별 사이, 인식과 인식의 사이, 그리고 우리들 사이의 광활한 공간에 위치한 채로, 이 의문들은 아주 조용하게 반짝거린다 - 우리가 깨어날 때까지.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감독의 뉴런 같아서, 영화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어디까지가 등장인물의 상상이어도 되고 어디까지가 아니어야만 하는지 이리저리 패치워크를 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점을 부단히 이어가다 보면 (connecting dots) 결국에는 단체(simplex)나 더 나아가서는 다양체(manifold)로 이어지게 마련이 아닌지? 전반적으로는 평점들이 불합리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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