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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Apr 13. 2024

대기업에 굳이 안 갈 이유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없거나 있거나 그렇다 (feat.라떼는)

2012년, 라떼는 스타트업이란 말이 없었다. 당시 대기업 취업에 실패해서 벤처 기업에 들어갔다는 동기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쿠팡? 그런 데를 들어갔다고?"


대기업이 아닌 곳에 들어가면 취업에 실패한 취급을 당했다. 그런 취업 지형도에서 아예 지도 밖으로 벗어나자고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소위 멀쩡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원을 해본 대기업은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그룹인 C사 딱 한 개였다. 나머지 지원한 큰 기업은 모두 언론방송사였다. 그 마저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이 사람, 다 실패하고 안 갔다고 말하는 거 아냐?


의심 마음껏 하시라...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겠다. 백방으로 지원하고 떨어져서 못 갔으면 후회라도 없다. 10년 뒤에 '그래도 그때 지원이라도 여럿 해볼걸...'이라고 말하는 서른 중반이 될 거라고, 나는 죽어도 몰랐다.


내가 몰랐던 건 미래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조직이나 대기업이나 어차피 지루하고 지난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작은 조직이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 회사원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다. 대기업에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더 나은 경험도 없을 거라 믿었다.


오히려 두 조직의 차이는 경험의 폭에 있었다. 졸업 이후 들어간 문화예술단체에서 해본 가장 큰 축제는 참가자 300명 규모의 지역 축제였다. 내가 지원했던 C사의 음악 축제는 몇 만 명이 참여한다.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만나야 할 사람도 조정해야 할 일도 다뤄야 하는 매개도 다양해진다. 그만큼 여러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경험이 쌓인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과 체계를 필수적으로 익혀야 한다. 불필요해 보이는 페이퍼워크와 확인 작업을 거쳐야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축제의 아주 작은 부분을 맡아도 축제라는 사업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배울 수 있다. 작은 축제를 여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된다. 이 말은 큰 조직에서 작은 조직을 가는 일도 어렵지 않다는 뜻도 된다.


좋좋소의 한 장면. 물론 저 정도는 아니지만 좋좋소 에피소드 두 개 정도는 쓸 수 있는 이상한 경험치가 생겼다.


작은 조직에선 시스템과 체계를 사람의 임기응변과 관습으로 메꾼다. 기준이 없이 매번 바뀐다. 여기에 적은 예산, 그와 부합하지 않는 사장의 야욕 등 제약 조건이 추가적으로 붙는다. 나에게 월급을 주는 단 한 사람의 성격, 성향 등 모든 것이 회사 의사결정에 중요한 조건이 되어버린다.


나는 대기업 신봉자가 되었다. 당신이 꿈이 있든 없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외국인도 아는 기업에 지원하라고 말한다. 유학을 가도 글로벌 기업인 샘숭 엘쥐가 이력서 한 줄을 차지하면 꽤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선 말할 것도 없다. 생각보다 출신 학교와 거쳐간 기업의 이름은 꽤 오래 따라다닌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별 볼 일 없는 커리어 덕분에 출신 대학 네임 벨류가 더욱 소중해졌다. 모래성 같은 커리어에 그나마 어디라도 다닐 수 있었던 건 소중한 대학 이름 때문이다. 그 한 줄이 날 이러나저러나 싫어도 회사에 다니는 운명으로 이끌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대한민국 일개미는 어디나 같다 / 출처: 카카오 이모티콘 일개미의 숨겨왔던 본심

회사원은 매일매일 주어지는 일을 해나가는 개미의 삶을 산다. 여러 개미들과 협동해서 줄과 열을 맞추고 병정개미, 일개미 등 각자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개미로 사는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그때부터 괴로워진다. 개미에게는 목표가 있어도 꿈이 있을 순 없다. 일개미가 일을 열심히 한다고 여왕개미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꿈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다. 꿈을 꾸되 현실적이고 치열한 목표를 설정하라는 말이다. 그 과정에 대기업이란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돈이라도 쉽게 모을 수 있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커리어 여정에 도움이 되는 한 줄을 만들 수도 있다. 꿈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이왕이면 가장 좋은 위치를 선점하라는 말이다. 참으로 꼰대 같은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대학부터 시작하여 선점해야 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서른 중반에 면접을 여러 번 보며 마주한 현실이다. 나이가 많은데 괜찮겠냐(아니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말이야?), 왜 오래 쉬었냐, 이직은 왜 그리 많이 했냐, 핀란드는 왜 갔냐까지. 대한민국은 여전히 정규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에 민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대학 졸업장에 박힌 이름 덕분에 면접에 초대를 받았다.


내가 살았던 핀란드는 이미 국가 차원에서 보장하는 복지 시스템이 탄탄하다.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차등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켈라(KELA) 복지 시스템 안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에선 육아휴직을 6개월 이상 쓰기 쉽지 않지만 일부 대기업은 사내 어린이집까지 갖추고 있다. 국가가 전면으로 보장해 줄 수 없는 복지를 기업이 책임져주는 시스템은 대기업과 비대기업의 격차를 크게 만든다.


2023년 기준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은 266만 원으로 약 10년 전 문과 출신 대기업 신입 연봉과 비슷하거나 조금 못한 수준이다. 이것은 정확한 팩트이자 피터팬이었던 나를 꼰대로 만드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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