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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Jul 11. 2023

비현실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의 생일

2023년 6월의 여성 작가 책 | 세상의 생일 (어슐러 K. 르 귄) 

책속의 말

이런 게 우리의 자유였다. 우리는 모두 유령이었고, 쓸모없고 겁에 질렸으며 상대를 놀라게 하는 침입자들이며, 삶의 모퉁이에 있는 그림자였다.
한 사회의 부정적 압력을 이겨내며 형성되는 관계들은 끔찍한 긴장을 견뎌내야 하지요. 그런 관계는 방어적이고 지나치게 격렬하며 평화롭지 못한 경향이 있습니다. 계속 자랄 공간이 없지요.
대부분의 사회는 아버지와 딸, 혹은 형제와 자매가 성적이지 않은 가족 관계를 맺길 기대하지만, 내 생각에 일부 사회에서는 나이와 성별로 권력을 지닌 자들이 종종 근친상간 금지를 무시하고 어긴다. 확실히 그런 사회들은 인간이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하고, 힘이 그 근본적인 구분이며, 한 성별에 더 우월한 힘을 부여한다.




운명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독서 모임 공통 책으로 고르게 된 “세상의 생일”은 이전부터 읽어봐야지, 하고 다짐했던 SF 거장인 어슐러 르 귄의 단편집이었다. 5월에 이 책을 고를 때만 해도 큰 의미가 있어서 고른 건 아니고, 그냥 읽어보고 싶다는 친구가 있었고 다들 동의해서 자연스럽게 정했다. 모임 날짜를 고려해 프라이드 먼스인 6월에 읽을 개인책을 따로 고르기까지 했는데, 르귄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나는 “세상의 생일”을 프라이드 먼스에 읽는 경험이 어떤 의미일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마치 ‘그렇게 될 일’이었던 것처럼 “세상의 생일”도 충분히, 아니 정말로 ‘퀴어’했다.


젠더‧섹스‧섹슈얼리티: 완전히 다른 상상력

“세상의 생일”에 수록된 ‘카르히데에서 성년이 되기’와 ‘세그리의 사정’은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도 등장하는 ‘에크문’을 배경으로 한다. 얼핏 보면 남-녀의 반전 같지만, 이 행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적 구분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성별 규범으로 우리가 집착하는 성별의 구분이 사실 마치 모래성같이 취약하다는 걸 깨닫게 한다. 이미 이분법적인 규범이 익숙한 현실에 사는 작가는 어떻게 이런 완전히 다른 행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궁금해지는 것은, 현실에서도 르 귄이 한 것처럼 젠더에 교란을 준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현실은 소설 속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 하고, 소설은 다시 현실에 영향을 주며 현실에 균열을 준다는 점이 재밌었다.


결국은 사랑 이야기

‘선택하지 않은 사랑’과 ‘산의 방식’은 다소 강압적인 인물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 등장한다. 간혹 나를 잃을 정도로 강렬한 사랑 앞에서 이들은 외부의 도움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나를 지키며 사랑을 이어나간다. 강압적인 사랑 방식을 마냥 옹호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산의 방식’은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샤헤르가 지배하던 산의 방식이 조화와 화합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샤헤르가 흔하게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인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마음먹은 게 좋았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나를 파괴하는 건 어쩌면 그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산의 방식’은 폭력에서 벗어나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비현실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르 귄의 소설이 대단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현실의 문제를 소설 속에 녹이는 것 아닐까. ‘산의 방식’에서 복잡한 규율 아래에서 금지되었다고 생각한 사랑은 위장으로 이어져 금기에 반문한다. 이는 자연스레 현실의 결혼 제도에도 의문을 갖게 한다. 소설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현실로 연장되는 문제적 이야기인 것이다. 르 귄은 가장 비현실적이고 낯선 배경으로 위장하지만, 결국 익숙한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더욱 위화감이 들거나 문제를 의식하게 한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단편에서 함축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며, 내가 왜 SF를 좋아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하는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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