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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Aug 13. 2023

최애를 잃고 나는 쓴다, 이런 얘기 하지 말까?

2023년 7월의 여성 작가 책 | 이런 얘기 하지 말까? (최지은)

책속의 말

내가 사랑했던 그들도 결국 인간이 됐다. 무대 위, 화면 속에서 그토록 빛나던 그들이 어떤 의미로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과 계속 마주하고, 내 사랑의 이유 대부분이 그에게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것임을 확인할수록 최애는 그냥 인간이 되었다. 최애거나 최애였던 ‘오빠’들의 음주운전, 성매수, 성폭력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내가 쏟았던 열정은 환멸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엔딩이 사회면이었다. (p.52)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죽음에 일상이 멈춰버리는 경험에 대해 남자들은 얼마나 공감할까. 나는 가끔 궁금하다. (p.103)




작년 여름, 제주도에서 독서 모임을 하기로 했다. 어느덧 결성된 지도 1년이 넘었으니 기념 삼아 ‘동네북’(동네 여성이 모여 만든 북클럽)은 제주도까지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먹고 논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독서 모임이니 제주에 있는 서점에 갔다. 서점은 작지만 우리 취향에 맞는 책이 여럿 있었고, 제주도까지 독서 모임을 온 김에 서로에게 책을 한 권씩 추천했다. 친구들은 어떤 책을 보자마자 이건 내 책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띠지의 문구는 강렬했다. “내가 사랑한 남자마다 모두 폐허다”

어느 유명한 시 구절의 패러디였다. 이쯤에서 나의 과거 ‘덕질’ 전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내가 제일 처음으로 공식 팬카페까지 가입하면서 좋아해본 아이돌은 동방신기의 믹키유천이었다. 빅뱅이 온세상을 하이탑과 배기팬츠로 물들일 때, 나도 승리를 좋아했다. 이 두 ‘최애’는 나의 덕질 인생에 큰 상흔을 남겼고, 다시는 ‘현실 남자’를 좋아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문제는 이 둘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 아이돌도 몇몇 좋아했다는 거다. 그들 중에서도 사회 면에 등장한 이가 있고, 사회 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모 아이돌의 이 멤버를 좋아했다고 하면 모두가 나를 동정했다. 또는 앞으로 내가 좋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아이돌이 있다면 피할 테니 알려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이 책을 구매하고 나서 약 두 달 후 내가 좋아하던 모 아이돌의 모 멤버가 논란을 일으키며 그룹에서 탈퇴했다.)

이쯤되면 ‘내 취향이 문제인가?’가 아닌, ‘대체 남자 아이돌은 왜 그럴까?’로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어야 나의 취향을 의심하지. 매번 좋아할 때마다 결국에는 문제가 생긴다면, 그리고 남자 아이돌이 가해자로서 사회 면에 등장한 세월 동안 여자 아이돌은 주로 피해자로서 사회 면에 등장하게 된다면, 이건 나의 잘못보다는 남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을 쓴 작가님 또한 나와 비슷한 과거를 회상한다. 열정적으로 덕질할수록 크나큰 환멸을 돌려주었던 그들에 대해서. ‘최애’를 잃었다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작가는 대중문화 기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일상에서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는다. 이 땅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느낄 분노와 죄책감, 피로감까지 그 복잡하면서도 때로는 모순되는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 솔직한 고백은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책을 여러 권 쓰고 강연을 다니는 작가님 또한 이런 고민을 하신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난다. 내가 불완전하고 멋있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 같아서, 조금 더 아등바등할 힘을 얻게 된다.

문득 대학생 때 작가님의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대중문화에서 강압적인 남자 주인공이 흔히 등장하는데, 가끔 그런 남자 주인공에게 설렐 때 죄책감이 느껴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여쭤보았다. 하도 오래 전이라 질문만 기억나고 답변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 나는 그 답변에 위로를 받았을 거 같다. 시간이 오래 흐른 후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비슷한 결의 위로를 받은 걸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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