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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Feb 18. 2024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2024년 1월의 읽고싶은책|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책속의 말

우리는 뭐든 처음 접한 건 금세 잊어버린다. 잊어버리는 건 두뇌가 작동하는 기본적인 방식이지,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잊는 속도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결국 다 잊게 되는 건 모두가 똑같다. 그러니 잊었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 (p. 63)
아무리 문법에 맞는 말이라도 그 문화권에서 쓰지 않는 표현을 만들어 말하면 상대가 좀처럼 알아듣지 못한다. 그 문화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 즉 프로토콜에 맞는 표현을 사용하면 발음이 좀 엉망이라도 귀신같이 잘 알아듣는다. 그래서 프로토콜을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의 언어를 사용할 때는 표현은 서툴지라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p. 68)
우리 모두에게는 탐험가 개미의 정신이 필요하다. 당장 가치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쑤시고 다니는 열정, 이것이 없다면 우리 삶은 쳇바퀴처럼 같은 곳을 맴돌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신의 90퍼센트는, 아니 어쩌면 99퍼센트는 일개미의 정신이어야 한다. 이 일개미의 정신이 있어야만 탐험가 개미의 정신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281)




최근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라는 긴 제목의 책. 동선이 맞아 도서관까지 동행한 친구가 책 제목을 보고 물었다. “삶이 괴로운 거야, 공부를 하고 싶은 거야?” 나는 웃으며 삶이 괴로운 거라 답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공부도 조금 해보고 싶었다. 단지 시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이 책의 저자가 하는 것과 비슷한 공부를.

한평생 한국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나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최적화되었다. 학창시절에는 수능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취업 준비생 때는 좋은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했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점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에 대부분의 공부는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공부였다. 이제 그런 시험과 조금은 멀어져도 되는 시점에 공부하겠다고 맘을 먹으니, 어떻게 해야 단순히 점수를 잘 받는 공부가 아닌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공부 그거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그 답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명실상부 ‘공부 전문가’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각 장의 주제는 저자가 이제껏 맛본 공부 주제들이다. 음식, 언어, 자연, 예술, 사회, 퍼즐, 인체. 수도 없이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는 저자의 공부는 선형적이지 않다. 갑작스레 시작해서 어느 정도 하다가 질리면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게다가 공부라고 하는 것마다 독특하다. 대체 누가 4년에 걸쳐 계란 삶기를 공부하겠는가. 이걸 정말 ‘공부’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라고 부르지 못할 건 뭔가. 공부란 반드시 ‘결과물’을 내야 하고, 점수든 학위든 무엇이든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저자는 일곱 장의 주제에 걸쳐 깨부순다.

저자의 공부는 누가 뭐래도 재밌어서 하는 공부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공부이고, 그 과정에서 분명 진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기조는 재미다. 새로운 것에 관한 탐험, 지식을 얻어가는 쾌감, 그것이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거기서 나만의 깨달음을 얻고 즐거움을 얻으면 된다. 그렇다 해서 저자가 현실에서 발을 붕 띄우고 새로운 탐험만 하라고 무책임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우리 정신의 90%는, 아니 어쩌면 99%는 일개미의 정신이어야 한다. 이 일개미의 정신이 있어야만 탐험가 개미의 정신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공부하고 싶다고 나의 본업을 내팽개치고 새로운 것만 좇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공부는 매번 같은 것처럼 느껴지는 일상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매번 지나다녔던 집 근처 숲에 있는 꽃과 나무의 이름을 공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된 저자처럼 말이다.

이전에 트위터에서 ‘공부란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는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아마 한 일본인의 트윗을 번역한 트윗이 한국 트위터리안 사이에서도 많이 퍼져나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만큼 공부의 참뜻을 한마디로 깨달아본 적이 또 없는 듯하다. 이런 의미의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의 책을 읽는 것 역시 내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일이다. 조금 더 선명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공부하는 법’을 찾기보다 일단 해보기로 한다. 그것 또한 나에게 공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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