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여성 작가의 책 | 지난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
나는 그것을 말로 옮김으로써 실재로 만든다. 그저 말로 옮김으로써 완전하게 만든다. 이 완전함은 그것이 내게 상처를 줄 힘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말로 옮김으로써 고통을 없앴으므로 나는 단절된 부분들을 결합하면서 큰 기쁨을 얻는다. 이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일 터다. 그것은 글을 쓰면서 내가 무언가의 속성을 발견하고 어떤 장면을 제대로 살려 내고 어떤 인물을 결합할 때 느끼는 환희다. (p. 19)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은 현재가 깊은 강의 수면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듯이 흐를 때뿐이다. 그럴 때면 수면을 뚫고 내려가 밑바닥을 마주한다. 그런 순간에 나는 무한한 충족감을 느낀다. 내가 과거를 생각하고 있다는 충족감이 아니라, 그 순간 내가 현재에서 더없이 충일하게 살고 있다는 충족감이다. (p. 58)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여자들 앞에서 분노에 탐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물론 부분적으로는 여자들이 당시에 (금박 입힌 천사의 모습이었지만)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가슴을 치고 신음하며 자기를 극화하면서 감정을 드러낼 때의 연극적 요소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길은 아버지가 여자들에게 의존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연기를 보아 줄 여자, 자기에게 공감하고 위로해 줄 여자가 늘 필요했다. (p. 130)
나는 한 해의 첫 책에 의미를 두는 걸 좋아한다. 새해에 처음으로 듣는 음악이 그 한 해를 결정짓기라도 하듯이 신중하게 새해 첫 곡을 고르는 사람처럼, 책도 내게 의미 있는 책을 한 해의 첫 책으로 읽고 싶었다.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독서 모임의 공통 책이 첫 책이 되거나, 서로에게 선물한 책이 첫 책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다 내게 어떤 식으로든 깊게 다가오는 책이 되었다. 2024년의 첫 책 역시 독서 모임 멤버 각자가 가지고 있던 책을 랜덤으로 선물해 읽기로 했는데, 내가 받은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회고록인 “지난날의 스케치”라는 얇고 작은 책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이라는 것만으로도 벌써 내게 의미 있는 책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난날의 ‘스케치’라는 제목답게 울프는 첫 번째 기억부터 ‘스케치’한다. 울프는 이 책을 내내 연속적으로 써 내려가지 않았다. 다른 이의 전기를 집필하다가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 쓰곤 했다. 따라서 이 책의 처음은 명확하지만, 끝은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다. 파편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울프는 자신의 여러 기억을 글로 옮겼다. 선명한 선을 따거나 채색하지 않고, 그저 거친 선만 남긴 스케치화가 더 멋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듯이 기억을 거칠게 스케치한 이 책의 방식도 미완성이라기보다는 의도된 멋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스케치’라는 제목답게 울프가 보는 것을 마치 내가 보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묘사가 생생하다. 작가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나 명확히 기억하는 사람인 것인지, 또는 명확히 느끼도록 묘사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인지 궁금하다. 만나본 적 없는 울프의 가족과 형제의 모습은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어제 만난 사람 같다.
울프의 글이니만큼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시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다. 회고록에는 가부장적인 남성인 아버지와 오빠 조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가정 내에서 폭군처럼 지배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 조지는 자신의 오롯한 힘으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보다 여동생인 울프를 동원한다. 남성의 욕구는 타인을 이용해 실현해도 되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성의 욕구는 남성에게 순종하기 외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처럼 타인을 희생하지 않는 것임에도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울프와 에드워드 시대, 빅토리아 시대에 머물러있는 남성이 함께 공존하는 저택에서 세계의 충돌은 이 책을 통해 스케치를 남겼다. 그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스케치를 보고 우리가 남길 사진과 견주어본다. 앨범에 빅토리아 시대 스케치와 지금 2020년대의 사진을 함께 붙여놓고, 앞으로 어떤 사진─혹은 사진이 아닌 무언가─을 붙일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먼 옛날의 여성, 울프의 삶은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