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의 읽고 싶은 책 | 망설이는 사랑 (안희제)
팬과 아티스트가 주고받는 마음이란 단지 아이돌 산업이 만들어내는 상품이라는 말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대상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팬심이라는 것은 각자의 삶의 과정 안에서 각기 다르게 고유한 형태로 솟아나는 마음이다.
매혹으로 가득한 공론장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그것은 (공론장의) ‘변질’이라기보다 차라리 ‘본질’에 가깝다. 그러나 “꿈속에서 꿈을 인지하지 못하듯, 사회상태 속에서 우리는 타자로부터 유입되는 막대한 암시, 전염, 영향의 힘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론장을 감정이 부재하는 표백된 대상으로 계속 상상하게 되는 이유일 테다.
여성학자 김주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대해 소셜미디어와 해시태그를 타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가해자 단죄 및 캔슬을 속도의 페미니즘이자 관성의 정치라고 명명하며, 사실관계 파악과 별개로 이뤄지는 재빠른 판단과 단죄가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과 페미니즘을 통한 논쟁을 차단했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이미 정해둔 채 옳음을 향해 내달리는 관성의 정치와 ‘도덕이 된 페미니즘’의 속도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일 수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그는 “가해자 감별사 혹은 폭력의 소비자”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토론과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적 담론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과시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행동 패턴은 온라인 공론장들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 즉 그랜드스탠더는 이런 논란 안에서 자신을 ‘대중’이라는 이름의 ‘옳은 편’으로 규정함으로써 타인들의 인정을 받고자 논란 속 팬들과 아티스트에게 과도한 비난을 쏟아내기도 한다.
논란 속 공론장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과 믿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실제로 무엇이 이성적인 판단인지보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 ‘행복을 줄 수 있는 것’ 혹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서 ‘도덕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느끼는 감정,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관심이 중요하다. 이렇게 받게 되는 관심은 다시금 그 감정과 믿음을 강화한다. 관심과 감정, 관심과 믿음은 순환하며 서로를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 증폭의 과정은 그 자체로 도덕 혹은 ‘도덕적인 것’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상상, 이를테면 ‘정의 구현’으로서의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을 촉진한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였다
유명한 시구를 인용한 것은 나의 이제까지의 아이돌 덕질이 정확히 저 시구에 걸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 멤버는 하나같이 ‘논란’에 휩싸였고, 논란을 넘어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기에 이르렀다. ‘구 최애’(이전에 좋아했던 연예인)가 누구냐는 질문에 몇몇 이름을 대면 대부분 “아….” 하고 짧게 침음하며 금세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내게 문제가 있나 싶어서 아이돌 자체를 피하게 됐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어김없이 다시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고, 수시로 논란에 휩싸이는 케이팝 아이돌 세계 한가운데 뚝 떨어지게 됐다.
몇 년 만에 아이돌을 좋아하려니 문화가 많이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그사이에는 코로나라는 거대한 사건까지 겹쳤다. 아이돌에 다시금 입문한 나는 한동안 아이돌 팬덤과 나를 분리하려고 했다.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지만 어떤 팬덤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며, 수많은 사불(사이버불링)이 난무하는 이곳은 내가 속하고 싶은 곳이 아니라고. 이는 사실 오만한 생각인데,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상 좋든 싫든 이 세계에 편입한 사람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 역시 아이돌 팬덤에 대한 편견이 있던 셈이다. 이 시점에 S님에게 선물 받은 “망설이는 사랑”은 내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아이돌 팬이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아이돌 산업의 본질과 팬덤 문화를 탐구하며, 흔히 말하는 ‘논란’이 발생했을 때 아이돌 팬의 태도와 ‘망설임’이라는 행동의 역할을 아이돌 팬과의 인터뷰를 통해 풀어냈다. 아이돌 팬이 아닌 독자를 고려하여 용어 설명부터 시작해, 흔히 인성 관련 논란 속 관심 경제와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양상을 살핀다. 특히 한국형 캔슬 컬처가 어떤 모양을 띠는지 설명하고, 온라인 공론장의 성격에 대해 논한다. 아이돌 산업의 특성상 아이돌 아티스트를 즐거움, 행복을 약속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사랑을 생산 및 유통하는데, 이 즐거움과 행복에는 도덕적 가치로서 인성이 결합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비도덕적인 아티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며, 자신을 ‘옳은 편’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과시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불링은 정의구현으로서 작동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버불링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논란의 개인화는 산업 구조 자체의 문제를 은폐하고 아이돌 개인의 인성 문제로 환원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팬들은 논란이 발생함과 동시에 급격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모순을 경험한다. 자신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과 팬으로서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경험은 많은 팬이 공감할 만하다. 자신의 덕질이 돌판 안팎의 불평등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실천하는 과정에서 팬들은 ‘망설임’이라는 행위를 선택한다. 케이팝 산업은 성차별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 루키즘과 같이 아이돌 산업을 소비하는 방식과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수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이때 팬들이 지속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산업 자체의 충돌로 인한 ‘망설임’의 연속을 겪곤 한다. 이 망설임은 너무도 빠른 논란의 속도에 의문을 표한다. 단지 논란이 발생한 뒤 해당 연예인이 ‘치워지며’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고, 팬 자신도 변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망설임’이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나는 최근 급격히 늘어난 사이버불링에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SNS상에서 수많은 연예인, 이제 연예인을 넘어 인플루언서, 웹툰 작가와 같은 일반인까지 ‘사이버 처형대’에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사람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이버불링을 보며 분노하기도 하고, 일종의 공포도 느꼈다. 그 공포의 일부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라는 것에서 오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맹목적인 사이버불링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돌판’ 한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팬으로서의 정체성과 다른 정체성이 수도 없이 충돌하는 경험을 하며 내가 마모되는 듯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충돌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논란의 속도를 따라가기보다 나의 힘으로 생각하고, 나의 속도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단 사랑하게 된 이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