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눌루랄라
어쩐지, 이건 내 운명인 것 같다.
돌고 돌아도 결국 이 자리인 것. 진짜 내가 원하는 길을 찾겠다며 야심 차게 퇴사한 지 5개월 만에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여기가 내가 찾은 '진짜 원하는 길'이었냐고?
애석하게도 아니. (일단 아직은.)
5개월이라는 시간은 막연히 짧지만은 않을 것 같은 내 남은 날들을 결정하기에 그리 충분치 않았고, 나는 그 시간을 쪼개고 아껴 부지런히 살만한 위인은 되지 못했기에 야심 찼던 퇴사는 마음의 여유를 잃을 때 즈음 더 간절해지면 멋도 유우머도 잃을지 모른다는 알량한 자존심만을 챙겨 이직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쩐지, 다소 세상의 등살에 떠밀려 온 이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음에도 이것이 내 운명이라고 단언하는 건 지금의 내가 꽤 오래 전의 나로부터 출발했다는 걸 많은 순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그것들로부터 뻗어나가는 세계를 지켜보며 때로는 운 좋게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 날것의 고귀한 창작물을 잘 다듬고 포장해 세상에 처음 내는 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생명력 있는 나의 일, 나의 Job!
말로 설명하자면 어쩐지 명치끝에 찌르르한 감격 같은 것이 번지는 일이 나의 직업이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들이 나이테처럼 한 겹 한 겹 나를 이루었다는 것을 문득문득 마주칠 때마다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된 운명이라 느낄 뿐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도 앞서 김해피의 말마따나 N잡것들이 된 역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스스로 인지하는 시점부터 한 번도 덕질하지 않은 적 없는 애정 넘치는 인간의 첫 둥지는 그대만의 왕자임을 자처하던 'SS501'('더블에스오공일'이라고 읽는다. 쩝.) 오빠들이었다. 자금력이 0에 수렴하던 초딩 시절의 첫 덕질은 용돈을 모아 오빠들의 화보가 실린 '미스터 케이'나 '와와 109'와 같은 팬시 잡지들을 사 모으거나 회사로 전해질 지 모를 팬레터를 보내는 것, 독학으로 익힌 포토샵 실력으로 펜띠나 이름표, 손글씨 배너 같은 것들을 만들어 팬카페에 공유하거나(지금 생각해보면 비공굿(팬들이 만드는 '비공식 굿즈'의 준말)의 시초가 되시겠다.) 출연하는 방송과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순위 투표에 매진하는 것, 그러다 한 번씩 드림콘서트나 공개 방송, 지방 행사 같은 무료 공연에 쫓아가 목이 터져라 응원법을 외치며 풍선을 흔드는 것 등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하는 활동들이었다. 옷깃 한 번 스쳐본 적 없는 이들의 성공과 안녕을 빌며 그토록 내가 행복할 수 있다니.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던 그 시절, 내 첫 덕질은 언젠가 그들과 함께 일하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나를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이끈 첫 번째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독한 운명의 첫 단추는 그렇게 끼워진 것이다.
최애 생일부터 데뷔일, 하다못해 그룹 이름에도 숫자가 들어가니 각종 비밀번호 속에 기생하던 구오빠들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그 세력을 쉽게 떨치지 못하지만, 중학생이 되며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자 마음의 방에는 오빠들 외에도 입주자가 하나 둘 늘어갔다. 그러나 점처럼 놓였던 덕질의 연대가 하나의 명확한 선으로 연결된 지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느 한 곡의 음악을 처음 듣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형광등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맞은편 승강장에 서 있던 의문의 남자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인생을 바꿀 쪽지 하나를 건네주고는 사라지거나 지구의 멸망이 가까워 온 것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재난 상황에서 작은 구멍 사이로 생명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영화 속 순간처럼 극적이진 않더라도, 사람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터닝포인트가 있다면 나에게는 그날이었으리라.
2008년 가을, 그래, 딱 이맘때쯤이었다. 코끝에 상쾌한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맴돌던 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음악깨나 들었을 것 같은 학원 선생님의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우연히 들었던 그 곡. 햇살은 쨍쨍한데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만 같은,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우는 것만 같던 그 묘한 우울함에 사로잡혀 집에 가는 길 내내 가사를 까먹지 않으려 몇 번을 읊조리다가 집에 오자마자 부리나케 컴퓨터를 켜고는 입술에 넘실대는 가사들을 옮겨 적었던 그 곡.
'안-녕 이-제 그만 / 너를 잊-어야지- / 그건 너무 / 어려운 얘기'
싸이월드 검색창에서 알게 된 그 곡은 롤러코스터의 '습관'이었다. 지금은(사실 그때도) 조원선, 이상순, 지누 세 멤버 모두가 너무나 유명한 뮤지션이기에 롤러코스터에 대해 구태여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습관'이라는 곡을 시작으로 찾아 듣기 시작한 그들의 음악은 그동안 내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당시에도 이미 발매된 지 8년이 지난 음반이었던 '롤러코스터' 2집 [일상다반사]였는데, 조원선의 보컬이 가진 특유의 비음과 허스키함, 짧게 툭툭 던지며 노래하는 창법과 일상적인 가삿말, 미디엄 템포의 훵크(Funk) 리듬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베이스 사운드와 티카티카- 끊어치는 기타의 간드러짐은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가요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록곡 중 '어느 하루'를 듣던 순간은 아직도 그때의 온도, 습도, 날씨, 장소, 옷차림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강렬했다. 세션은 왼쪽에서, 보컬은 오른쪽에서만 흘러나오다가 런 타임이 정확히 3분을 지나는 지점에서야 보컬의 목소리가 양쪽에서 들리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땐, 모노와 스테레오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상태였기에 음원 파일이나 이어폰이 망가진 줄 알고 몇 번을 다시 들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그 곡이 어떠한 의도-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에 의해 스테레오로 레코딩한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나에게 기술적인 신선함 이상의 감동을 주었을 때의 느낌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운명. 그저 음악 안에 살아야 할 운명이 시작됐을 뿐이었다.
롤러코스터가 중력을 거슬러 오르다 이내 땅으로 질주하듯 밴드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고 출발한 나의 인디밴드 덕질 여정은 점점 대세를 거슬러 비주류 음악으로 향해갔다. 동네서점 안에 있던 작은 음반 코너에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으며 새로 나온 음반들을 들었고, 각종 포털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숨은 명곡들을 찾았다.(그러고 보니 인생에서 최고로 열심히 디깅 하던 시절...) 듣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아 주말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홍대 앞 라이브 클럽들을 전전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당시 유행하던 대형 커뮤니티의 '생활정보' 게시판에 음악 추천글을 연재했다. 그것이 지금의 플레이리스트 콘텐츠들과 결을 같이하는 걸 보면, 그렇게 나는 덕질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꾼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이 지독한 운명의 사슬을 끊어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에 갔고, 음악보다 글 쓰는 일에 심취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때에 김해피를 만났다. 앞선 김해피의 글을 읽고 나니 그녀를 만나고, 매주 공연장을 제 집 드나들듯 다니던 것이 우리의 운명에 방점을 찍었다는 강력한 확신이 든다. 그 시절, 공연장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만큼 즐거웠던 것이 없으니까. 삐끗하면 어디 한 곳은 남아나질 않을 지하 공연장의 높은 철제 계단과 눅눅한 곰팡이 냄새, 공연장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막차 시간을 놓칠까 봐 목에 피맛 나도록 달리던 합정역 5번 출구와 새벽까지 공연을 보고 뜬 눈으로 첫 차를 기다리던 합정역 사거리 24시 할리스 커피까지. 2n년간 각자의 잔에 독이 든 술이 부어지는 줄도 모르던 두 친구가 음악 소리 끊이지 않는 홍대 라이브 클럽 안에서 함께 잔을 부딪힌 순간, 그들은 헌신적인 문화노동자의 삶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건배는 마치 도원결의 같은 것이었을까. 김해피와 나 모두 음악산업의 N잡것이 된 지금(네, N잡러 아니고요.), 여기 노모어잡클럽 no more job club을 오픈한다. 김해피의 글을 빌려 설명하자면, '우아한 N잡것 라이프를 도모하고 격려하는' 프로젝트이자 '일에게 삶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N잡것-예민함=0 임을 인정하지만 결코 다정함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서 의식 같은 것'.
단순하게 요약하기에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기도 하고, 워낙 두 인간들 자체가 세상 만물에 관심과 애정이 가득한지라 어쩐지 설명이 장황하지만, 내가 집중하고 싶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덕심을 기반으로 한 문화판의 직업인으로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운 시간마다 내 편 하나쯤 있다는 연대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적어도 이 운명 공동체 안에서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이 미친 업무량과 끝없는 열정페이, 그러면서도 "우린 원래 이랬어." 같은 말들로 자행되는 악습에 몸과 마음을 갈리다가 제 풀에 꺾여서는 안 되니까.
좋아하는 일이니까,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하며 그간 스스로도 내 업에 많은 면죄부를 줬다. 그러는 동안 동경은 동기가 되고, 결국 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반성문이다. 제가 잘못했어요, 이것이 직업인으로서의 운명이라면 좀 더 현명하게 일해볼게요, 라는 고해성사. 내 일을 '잘' 사랑하기 위한 고군분투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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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좋은 음악과 멋진 창작자들이 많고, 그들은 언제나 나를 처음의 그것처럼 설레게 한다. 동경하던 이들의 이름을 일상처럼 부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그들의 세상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부푼다. '조원선'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여전히 나를 꿈꾸게 하고, 롤러코스터의 '어느 하루'를 들을 때면 여전히 2008년의 가을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음악에 울다가도 음악에 위로받는, 벌과 복이 혼재되어 어느 것이 벌이고, 어느 것이 복인지 모를 요지경 인생.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나의 직업.
결국 이 운명의 본질은 사랑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질척여보기로 했다. 운명을 직시할수록 운명이 아닌 것을 정확히 구별해낼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직업인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나의 반성문이자 다정함을 잃지 않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이다. 운명 공동체 안에서 만난 우리가 부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를 바라며. 사랑하는 일에 더 이상 의심이 들지 않기를 바라며.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운명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