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Korea
보통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저는 프로 벼락치기러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잘 생각나는 최근 수업 순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흥미를 잃지 않기 위함이에요. 사실 제가 글을 쓰는 재미를 잃고 영혼 없이 써내려 갈까 봐 여기부터 쓰는 겁니다.
제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것들을 전달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화법과 생각이 많이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재미없는 말로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에세이, 철학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있지는 않겠지만 저는 이 책이 일기장이나 에세이를 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분야의 책은 사람이 썼기에 에세이이고, 화법이 묻어있기 마련이지 않나요? 이 책을 읽는 독자님께도 제 이야기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즐거움, 그 이상이길 바랍니다. 스쳐가는 글이 아닌 마음에 남는 한 문장, 한 단어로라도 남길 바라요.
우리는 무엇을 여행이라 부를까요? 저는 여행자의 마음을 가질 때에 그 장소는 여행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상치 못한 것을 반갑게 느끼고,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아도 우연이 또 다른 것을 볼 기회를 준 것이라 느끼는 ‘마음’이요. 그런 점에서 제 많은 날들은 여행이 맞습니다.
학창 시절, 나름대로 고심 끝에 끄집어낸 저의 좌우명이 있어요. “가슴 뛰는 삶을 살자.” 좋아서 설레고, 무서워서 쿵쾅거려서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질 때에 삶을 살아낼 이유가 내 눈앞의 일임을, 내가 이 순간을 오롯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듯 동화 같은 일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어요. 언제나 가슴이 뛰어서는 심장병에 걸리고 말 테니 이 정도면 괜찮다 생각했던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저 스스로를 재단하고 감시하고 조금씩 깎아냈어요. 그것이 이 삶에 적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일이든 어려움과 한계 끝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순간이 오겠지만 이 견딤 끝에 제 상사의 모습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굳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은 저를 전혀 기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행복과 불행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믿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제로썸 같았어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 주어도 다시 이 것을 위해 일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삶의 진리가 돈을 벌고, 쓰고, 가치를 교환하는 일 같았습니다. 삶에 기쁨은 왜 그렇게나 찰나인지. 서글펐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있잖아요? 바로 숨 쉬어 살아있다는 것이죠!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이었습니다. 평일 아침, 사람이 없는 전시회에 오픈런하고 오후의 햇살이 드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삶.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고작 몇 년 만에 확신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서는 내가 내가 아니게 되겠다는 것을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 것임을요. 좋아하는 것이 바뀔 수는 있지만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