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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Sep 27. 2023

따로 또 같이

“원, 투, 쓰리, 번지!”

    대학 시절, 호주 시드니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싱가폴과 말레이시아에서 온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키도 고만고만한 애들 다섯이 모여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뉴질랜드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다. 뉴질랜드하면 배낭여행 아닌가. 여행 준비로 가방을 사러 가기 전에 배낭여행을 많이 해본 미국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추천받은 시드니의 몇몇 가게를 샅샅이 훑어 내가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배낭과 작은 침낭을 샀다. 그런 후, 함께 가는 친구들과 뉴질랜드 전문 관광 패키지를 끊었다. 배낭 여행객들의 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구성이 잘되어 있어서 주요 도시들을 기간 내에 진행 방향을 정해 이동을 하되 각 도시에서는 며칠이고 있을 수 있었다. 이동은 버스로 하는데, 숙소 앞 픽업을 하루 전날 전화로 예약하는 시스템이었다. 전반적 운영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운전기사의 역할이 정말 신기했다. 

    각 도시로 이동할 때 메뉴판 같은 걸 돌려 다음 도시에서 묵고 싶은 숙소와 하고 싶은 체험활동을 신청받았는데 옵션을 꽤 다양하게 주고, 가는 동안 예약까지 해주는, 그야말로 이동하는 1인 여행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사가 관광안내도 하고, 도착할 즈음해서는 자기는 오늘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을 할 계획이니 심심한 사람은 오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버스 기사가 입담을 풀어놓으며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도록 도와주었는데 그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감탄스러웠다. 


    애써 사간 배낭이 무색할 만큼 편하게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다 북섬의 분화 호수인 레이크 타우포로 이동할 때였다. 운전기사가 돌린 설문지에 번지점프와 스카이다이빙이 목록에 있었다. 친구들은 번지점프가 시작된 나라가 뉴질랜드인데 여기까지 왔으니 그거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높은 거, 추운 거, 빠른 거 등등 무서운 게 많아 안 하겠다고 꿋꿋하게 버텼다.

    유스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다음 날이 되어 친구들은 번지점프와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떠났다. 친구들과 며칠째 24시간 붙어있던 터라 혼자 숙소에 있으니 조금 쓸쓸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공백이 좋기도 했다. 하이킹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숲길이 너무 고요해 혼자 걷는 게 문득 긴장됐다. 
    그때였다. 저쪽 앞에 어떤 사람이 가는 게 보였다. 길동무가 있으면 그래도 덜 무섭지 싶어서 발걸음을 서둘러 쫓아갔다. 민소매 티를 입은 여자였고, 키가 큰 백인이라 유럽 사람이 아닐까 했다. 내가 따라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짧고 탁한 금발 곱슬머리에 붉은색 스카프를 이마 위로 동여맨 커스틴은 독일에서 왔다고 했다. 남편은 두고 혼자 여행을 왔단다. 그때만 해도 한국 문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라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결혼을 한 직후에는 취미도 함께 하고, 여행도 함께 다니고, 남편과 모든 걸 함께 하려 했단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재미가 없어졌고, 할 이야기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그래서 남편과 방도 각자 쓰고 가끔은 휴가도 따로 가기로 했다며, 이 여행도 그렇게 혼자 온 거라고 했다. 각자의 시간을 다양하게 갖기 시작하니 서로의 일상이 다시 궁금해지고, 관계가 풍성해졌다며 웃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여행하며 점점 친구들과의 대화가 줄어든 게 살풋 이해가 됐다. 

   지금 친구들은 모두 번지점프를 하러 갔는데 나만 혼자 안 갔다고 하니, 커스틴이 바람을 불어넣었다.  
  “내가 같이 가줄까? 가서 보고 결정해도 좋지 않겠어?”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가서 번지점프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하자 싶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더 걸어서 도착한 번지점프대의 티켓 판매소에는 커다랗게 안내판이 있었다. 번지점프대는 47미터 높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껏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는데 그 문구가 안심되지도 않고 웃음이 나지도 않았다. 저 까마득한 아래에는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펼쳐졌는데 원하면 떨어질 때 물에 담가준다기에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아아, 이건 아니야 싶은데, 세계에서 가장 청정한 물이라며 계속 친절하게 꼬드겼다. 귀가 팔랑. 정말 그런가 하고 나가서 다시 아래를 봤다. 
 ‘그래, 이런 물이라면 빠져 죽어도 기분은 안 나쁘겠구나.’ 
  심호흡한 후, “어때, 해볼래?” 묻는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스틴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기 갈 길을 갔고, 나는 그 여행에서 했던 체험활동 중 가장 큰 비용을 냈다.


  안전요원은 나에게 헬멧과 하네스 안전벨트를 채워준 후 번지점프대로 데려갔다. 
  “잠깐만요, 잠깐만요!”하며 뒤로 자꾸 물러나는 나를 침착하고 친절하게(?) 몰아서 허공 앞에 세워놓고는 머리 위로 팔을 쭉 뻗어 두 손을 꼭 쥐게 했다.  
  ‘원, 투, 쓰리, 번지!’라는 구호를 자기가 외치면 그대로 나무막대처럼 앞으로 쓰러지듯 뛰어내리란다. 말이 쉽지, 다리가 후들거려 세 번을 내리 주저앉자 안전요원이 엄한 얼굴로 “이번이 마지막 시도입니다. 못하면 환불 없습니다.”라며 경고했다. 지난 몇 달간 이 여행을 오려고 생활비를 한 푼 두 푼 아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오기가 발동했다. 이게 어떤 돈인데! 그냥 그렇게 거금 백달러를 버릴 수는 없었다.

  

   “원, 투, 쓰리, 번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죽자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데 우와 세상에나. 번지점프가 진짜 무서운 순간은 뛰어내리는 순간도 아니고, 떨어지는 순간도 아니었다. 정말 무서운 순간은 탄성력에 의해 다시 올라갈 때였다. 눈 감은 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한참 떨어지다 실눈을 살짝 떴다. 갑자기 줄이 튕기더니 내가 뽈뽈뽈뽈 올라가는 거다. 짧아 보여도 체험하면 꽤 긴 시간이라 그동안 생각을 할 수 있다.
   ‘아, 지금 올라가고 있는 높이만큼 다시 떨어지겠구나.’
   올라가는 동안은 황당해서 비명도 안 나왔는데, 다시 떨어지니 또 비명이 나왔다. 그렇게 올라가는 동안 무서워하다 떨어지면서 비명 지르기를 몇 차례 반복하니 점차 올라가는 높이와 떨어지는 높이가 줄어들었다. 안도감과 함께 정신이 들면서 내 머리와 물 사이의 거리가 보였다. 아까‘물에 빠뜨려 줄까?’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고개라도 끄덕였으면 이렇게 거꾸로 매달려 물까지 먹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찔했다. 

   드디어 번지줄이 진정되고 아래에서 기다리던 주황색 고무보트가 다가와 기진맥진한 나를 누에고치처럼 받아 내려 산들바람 부는 호숫가에 풀어주었다.


   저녁이 되어 스카이다이빙까지 한 친구들이 돌아왔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번지점프에서 받은 사진을 보여줬다.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너 이걸 했어? 혼자?” 

  나는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나의 모험담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문예바다 2023 여름호 39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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