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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예경 May 11. 2023

<어른이 된다는 것>

에세이




  무거운 캐리어가 돌돌, 보도블록 위를 구릅니다. 서울역에 내려서 본 서울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굴러가듯, 목적의식을 갖고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역 앞에 줄지어 선 택시 등 도시의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서울은 그저 목적지를 향해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이었는데도, 청명한 오후 날, 잠깐 머문 그 순간에 설레고 말았습니다. 택시가 경기도의 대학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게 명쾌했습니다. 가야 할 대학이 정해지고,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장되는 자유의 시간으로 들떴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2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머리 위에 꽃가루가 날리고 대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큰 소동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줄 알았습니다. 아, 소동이 일어나긴 했군요. 잔뜩 취해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고꾸라지는 일 말입니다. 요란한 술집의 음악과 한껏 고양된 친구들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고, 자욱한 담배 연기로 코끝이 아렸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허무한 일이었습니다. 그 금단 시 되었던 술도 민증, 술값을 낼 카드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인데, 뭐가 그렇게 어렵고도 대단해 보였을까요. 그토록 대학을 원했지만, 막상 대학에 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원했냐 하면 그건 또 아리송한 느낌입니다. 제가 원한 건 어른일까요? 대학생이란 신분일까요?




  서울의 풍경에 설레던 날은 금방 지나가고, 저는 어느새 술 한 번 먹기 위해, 잠깐의 소란을 즐기기 위해 서울을 옆집처럼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막차는 끊긴 지 오래, 그렇다고 첫차를 기다리자니 애매히 늦은 새벽, 택시가 유려하게 상수동 골목을 지나 뻥 뚫린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경기도로 올라가는 길, 차창 왼편으로 강서구가 보였습니다.


아직 삭지 않은 열기와 취기로 새벽녘의 감성에 젖기엔, 미터기가 너무 빨리 달리고 있었습니다. 우울이 고개를 듭니다. 사실 이 친구는 아까 술자리부터 존재감이 드러났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우울은 항상 저와 동행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청춘을 즐기는 친구들처럼, 그저 바보인 채로 웃고 있고 싶은데 왜 저는 그게 잘 안 되는 걸까요.


힘든 집에 커서 빨리 철드는 건, 부유한 집 아이가 단정한 것과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고통이 끼어있어서 보는 사람이 슬퍼진다고요. 최선을 고를 형편이 안 되어, 차악을 선택해 온 인생이었습니다. 제 안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그라뜨리고, 바라던 꿈을 꺼뜨렸습니다. 돈돈, 전전긍긍하며 사는 게 지겨워, 부러 집에서 먼 대학으로 도망쳐왔습니다.


그런데, 빛나는 순간이 없으니 불행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혼자가 되니 우울이 찾아오더군요. 안 될 걸 바라보는 것보다, 될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서글펐습니다. 제게 꿈은 한여름의 롱패딩이었습니다. 위염 환자 손에 들린 치킨이었습니다. 남들은 쉽게 잘만 말하는 게, 그게 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에겐 일찍 철든, 차분한 겉모습 아래 제 체념이 보였을까요. 맞부딪히는 술잔에 일순간, 흔들리는 고통의 흔적이 그들에게 보였을까요. 왜 나는, 나 자체로 행복할 수 없는지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좁은 방, 그게 뭐가 사랑스러워서 3만 원이 좀 안 되는 돈을 내면서까지 가려고 했는지 한숨이 나왔습니다. 술값을 송금하고 나니, 폭폭 내쉰 한숨 섞인 밤은 저물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렇게나 저를 한껏 들뜨게 했던 시끄러운 술자리나 소란에 시들해졌습니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사건을 겪은 것은 아니었으나, 텅 빈 속을 그저 안주와 술로 꾸역꾸역 채우고 있던 걸 그제야 알아버린 탓이었습니다. 슬프고, 외로워서 속이 허했습니다. 그래서, 빈 속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어 입으로 씹고, 삼키고, 배를 불리는 행위에 집중해 우울을 어떻게든 무시해 보려 발악하고 있었습니다.


김소연 시인은 <시옷의 세계>에서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겨내려 발악하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긍정해 주는 것이 우울을 다루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울은 평생 저와 동행합니다.




  청명한 오후의 날, 모든 게 명쾌했던 순간은 지나가고, 요란한 밤을 보내고, 저는 지금 새벽 속에 있습니다. 새벽이 지나면 곧 동이 트고 아침이 됩니다. 저는 앞으로 푸른 새벽을 고즈넉이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제에 얽매여 새로운 해가 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내일을 반갑게 맞이할 줄 아는 사람이요. 해가 뜨기 전, 그 푸르름을 바라보며 사색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무늬만 어른인 지금에서,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술과 친구는 죄가 없으나, 그들은 제 공허를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걸 알았으므로, 술과 모임을 서서히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취해있기엔, 이 밤은 짧고 아름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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