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찾아온 기분 좋은 들뜸은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교실, 복도, 심지어 운동장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미술 시간을 가장 좋아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입시에 몰두하느라 작은 기쁨들을 서서히 포기해야할 거라 생각하던 어느 날. 책 속으로 작은 도피를 하고 싶어 들어간, 학교에서 가장 조용하고 서늘한 도서관 책장에서 고른 미술 비평서 하나는 취향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성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친절히 상상력을 달아주는 그림의 세계는 오랜 시간 취미, 소일거리이자 좋은 친구가 되었다. 대학에서 마음껏 미술사 수업을 찾아듣고 리포트를 썼던 모든 시간은 공부라기보다는 놀이에 속했다. 취향이 비슷한 친구를 만나 전시를 보고 감상을 나누고, 시간이 나면 여전히 관련 도서나 콘텐츠를 찾아 음미했던 모든 행위들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형성해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그림과 미술품을 마음에 두어왔기에 여느 때보다 더 반가운 마음으로 ‘무서운 그림들’을 펼칠 수 있었다.
이야기의 맛을 살리는 teller
넘쳐나는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콘텐츠에서 진행자의 역할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같은 게스트, 같은 소재를 두고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값은 달라진다. 시청률과 조회수가 아프게도 재미를 정확하게 수치화해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수치는 그야말로 기록이나 성적일 뿐, 소소한 특장점 즉, 셀링 포인트는 두고두고 시청자를 부르는 구심점이 된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스토리텔링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낸다. 저자의 소개에서도 볼 수 있듯 비전공자의 시선이라 더 쉽고 재밌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글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 미술사 입문자라면 스르륵-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끄는 친근함이 페이지를 넘기는 동력이 되어준다.
어느 정도의 취향과 지식을 갖고 있어 익숙한 작품들이 꽤 보이는 애호가라도 섣불리 챕터를 뛰어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책을 받아 몇 장 후루룩 넘겨보니 반가운 작품들이 보여 솔직해지자면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모네의 작품을 시작으로 정신없이 책에 빠져 이 작품은 어떻게 풀어낼까, 내가 몰랐던 어떤 일화가 숨어있을까 계속 궁금해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작가의 심정과 시대적 배경, 그림 속 모델에 대해 묘사하듯 매끄럽게 설명하는 흡입력 넘치는 문체는 정말이지 닮고 싶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미술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 많은 매력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사회·정치부 기자로 취재하며 쌓은 집요함으로 탄탄하게 자료조사를 하고, 그 팩트 사이를 신중하게 오가며 이야기로 선을 긋는다.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작가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추론한 것이다.
그림과 화가, 다양한 등장 인물에 관한 한 편의 미술 추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저자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미술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사실 위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듯 생동감 넘치게 풀어낸다. 그렇기에 읽는 모두가 설득되고 마침내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된다. 모르고 보면 그저 아름다운 그림으로만 보일 그림들의 섬뜩한 지점을 찾아내 다시 한 번 그림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도, '미술 스토리텔러' 이원율만이 할 수 있는 지점이다.
- 책 소개 중
만 명의 관람객, 만 가지의 감상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면 이제 관람객은 혼자 남아, 작품을 마음에 담는 감상이라는 행위를 하게 된다. 감상에 대해 어떠한 정의를 내리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정의내리지 않음으로써 정의내리기.’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만 명이 있다면 만 가지의 감상이 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제곱의 감상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떤 때에 그 작품을 마주하느냐에 따라 마음에 일어나는 파동의 크기와 감정의 색은 무한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에 보았던 작품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마음에 들어오는 경험, 다른 작가의 오마주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작품, 전시장에서 나와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는 이야기. 독서를 하고 영화를 보는 것과 결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환기하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그러니 누군가 감상법의 정석을 설파한대도, 그를 꼭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야기 가득한 그림들 속에서 풍성해지는 나로 향하는 길에 ‘무서운 그림들’은 친절하고 든든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레핀은 두 번의 반란을 모두 실패한 소피아를 상처 입은 암호랑이처럼 그렸다. 여전히 야성을 잃지 않은 그녀는 세 번째 반란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여전히 섭정으로의 위엄, 황녀로서의 존엄을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림 안팎에 있는 모든 이는 소피아가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림 속 소피아를 피해 멀리 떨어진 몸종은 이미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보고 있다. 죽은 채 창밖에 매달린 소피아의 최측근 또한 이제는 죽음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오직 소피아만이 자기 미래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강렬하면서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 pp.219-220, 러시아 황녀의 창문에 비친 것은 : 일리야 레핀, [알렉세예브나 소피아 황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