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로 피워낸 한국의 정서
Prologue.
‘정’이라는 단어는 다른 감정들과 달리 추상적이면서도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다. 사랑, 연민, 친밀함, 애틋함, 안타까움, 그리움 등의 감정을 한번에 일컬으면서도 때에 따라 하나의 감정만을 말하기도 한다. 맥락에 따라 뜻이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정’의 영역. 어떻게 좋고 싫음의 상반적인 감정적 상태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한국인인 나도 가끔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기는 한다. 언어화하기에는 고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한 듯한 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발레로 표현한다기에, 이 신선한 조합은 또 어떤 맛과 감동을 줄지 궁금해하며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소개
유니버설발레단 2023년 신작,
첫 번째 정기공연
한국적인 선율 위 그려지는 아름다운 발레
2021년 대한민국발레축제 공식 초청작 [트리플 빌 Triple Bill]로 초연한 [코리아 이모션 Korea Emotion]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정서인 '정'을 아름다운 몸의 언어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네오클래식 발레 작품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유병헌 예술감독 안무작으로 [미리내길], [달빛 영], [비연], [강원, 정선 아리랑] 외에 "情"에 대한 5개 신작을 선보인다. 국악과 컨템포러리 뮤직, 국악 크로스오버와 네오클래식 발레의 만남으로 아름답게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퓨전"을 통해 한국인의 '정(情)'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다채로운 빛깔이 담긴 무지갯빛 칵테일 같은 무대를 선사한다.
국악에 입힌 발레의 색채
으레 요즘의 문화예술 장르가 그러하듯, 정통적인 표현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범위를 확장하며 뮤지컬, 힙합 등 다른 장르와의 크로스오버를 꾸준히 보여준 발레가 국악과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상상력이 부족했던 때문인지, 발레라고 하면 아직도 정적인 몸짓과 전형적인 차분한 템포의 음악이 떠올라 흥겹거나 즐거운 느낌의 공연이 바로 연상되지는 않았다.
공연 시작 전, 단장님의 짧은 설명에서와 같이 한국 무용은 어깨와 손끝을 사용하고 가슴이 아래로 향하는 동작이 많아 사뿐사뿐하고 자유로운 모습에 가깝다. 반면, 발레는 가슴이 주로 하늘을 향하고 발끝으로 서서 몸을 지탱하거나 움직이는 동작이 많으며 통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다른 형태의 무용이라, 어떤 모습으로 이번 공연이 그려질지 더욱 궁금해졌던 것 같다.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자 눈앞에 펼쳐진 발레 무용수들의 모습은, 그러나 앞섰던 걱정과 의문을 한번에 녹여주었다. 다인원의 빠르고 활기찬 동작은 쉼없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들이 말하는 감정이 무엇일지 귀기울이게 했다. 어깨를 들썩이는 한국 무용의 요소를 전체 공연 프로그램의 공통적인 기본 동작으로 가져가면서, 정에 속하는 세부적인 테마-연인 혹은 부부 간의 사랑, 부모 형제와의 사랑-에 따른 다채로운 표정과 몸짓으로 흡입력 있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매력의 발견, 모던 발레
클래식 발레의 틀에서 벗어난 요즘의 발레를 ‘모던’ 혹은 ‘컨템포러리’로 칭하는 것에 대해 일부분 이견이 있으나, 편의상 이 글에서는 그를 모던 발레로 칭하고자 한다. 대중이 흔히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이 동화적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형식주의적 정통 발레의 아름다움도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정해진 동작과 전형 내에서 전통적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클래식 발레의 한계점을 다양한 표정과 역동적인 동작, 폭넓은 영역의 스토리로 보완하며 발레에 대한 단편적 선입견을 깨어온 모던 발레의 매력을 이번 공연을 통해 한층 깊게 느꼈던 것 같다.
컨템포러리, 모던 등의 이름으로 발레의 다양성을 오랫동안 고민해온 유니버설발레단답게, 정이라는 한국적 정서를 치열하게 분석, 해석하며 공연을 구성했음이 디테일한 부분 곳곳에서 느껴졌다. 여성 무용수는 치마, 남성 무용수는 도포를 활용해 국악 리듬과 발레 동작 사이에서 오는 정서적 간극을 보완하고, 무대 전체를 쓰는 화려하고 반복적인 점프와 턴으로 감정의 절정을 표현하며, 솔리스트 혹은 커플이 돌아가며 춤을 추는 방식으로 지루하지 않은 구성을 끝까지 가져가며 정의 의미를 하나씩은 모두 건드려 감정의 레이어를 잘 펼쳐낸 공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화려하고 정감있는 발레 공연이라니. 서로 다른 장르의 조합을 오랫동안 크로스오버라 칭해오며 더 이상의 새로운 조합이 있을지 피로해 하기도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탄생함에 있어 다시금 크로스오버라는 단어에도 생기가 도는 듯하다. 고전적임, 우아함, 정적임 외에도 발레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늘어난 것에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낀 공연이었다.
[공연 프로그램]
1. 동해 랩소디 Rhapsody of the East Sea - 앙상블 시나위
- 8 커플의 무용수들이 함께 추는 군무
2. 달빛 유희 Dancing Moonlight - 앙상블 시나위
- 여성 4인무 (Pas du Quatre)
3. 찬비가 Cold Rain - 앙상블 시나위
- 남성 4인무 (Pas du Quatre)
4. 다솜 Ⅰ Dasome Ⅰ - 피터 쉰들러 (Tristesse D` Amour)
- 여성 2인무(Pas du deux)
5. 다솜 Ⅱ Dasome Ⅱ - 피터 쉰들러 (Prelude)
- 남성 2인무(Pas du deux)
6. 미리내길 Mirinaegil - 지평권
- 2인무(Pas du deux)
7. 비연 Bee Yeon - 지평권
- 4 커플의 무용수들이 함께 추는 군무
8. 달빛 영 Moonlight Young - 지평권
- 2인무(Pas du deux)
9. 강원, 정선 아리랑 Arirang - 지평권
- 12 커플의무용수들이함께추는군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