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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과 올리브 Jan 26. 2022

제주, 이곳에 이끌려 돌아온다는 건

에세이를 빙자한 생태탐사 일지

누군가 제주에 전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제주는 어떤 곳이고 그곳에선 어떻게 지내야 하는 지를 물어본다면, 나는 해줄 말이 별로 없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내 선택도 아니었거니와, 난 그저 이곳에서 보낸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었으며, 결국 이 땅을 떠나 살게 되었으므로 내가 제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얹어줄 말이 있다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젠 타지 사람이 되어 이따금 제주로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감회와 추억과 익숙함과 또 새로움은, 내가 더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내 삶의 방식과 본성은 결국 이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의 사회는 나와 내 야심을 신물 나게 했고 지루하게 했고 떠남을 종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은, 자연만큼은 이보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끌어당길 수가 없다.

이 땅은 현무암질의 단단한 토양이다. 부드러운 공기 위에 가볍게 얹힌 황토 위를 걷는 것 같은 서울의 땅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그 땅 위에 자라난 제주의 초목들은 거칠고 두려우며 강렬하다. 그들은 강함을 숨기지도 않고, 내가 돌봐주마 하지도 않으며, 우리에게 타협을 할 여지도 열어두지 않는다. 죽거나 살거나. 다만 그뿐. 사계절이 존재하는 기후에서 태양이 좀 더 발을 들인 이 섬은 잔인한 면이 있다.


타협은 우리의 몫이다.



불길한 녹색으로 빽빽한 곶자왈은 초입부터 무시무시하다. 아름답다는 애처로운 감상 따위 끼어들 수 없도록 우리를 압도한다.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중무장한 숲의 천장은 너의 생명 따위 가볍게 빨아들일 수 있다고, 너도 우리의 일부로 포섭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정오에도 태양은 감히 그 신성한 결계를 침범하지 못하고 간신히 틈 사이로 겨우겨우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성성한 바위들은 감히 네가 똑바로 이곳에 서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울뚝불뚝 솟아 있다. 그곳에 쳐들어간 나는 태생부터가 불청객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관용을 빌기도 하는 전사이다.


그래서 이곳에 산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두려워한다는 것. 수풀 속에는 독뱀이 살고, 들판에는 나를 죽일 수 있는 병을 옮기는 진드기가 산다는 것. 공원에는 낙석이 떨어지고, 지붕이 태풍에 무너지는 것. 여름철 산딸기에는 가시가 있고, 가끔 길을 잃은 말들이 도로를 헤매는 것. 해안의 해파리는 다리를 붓게 하고, 절벽 근처의 돌바닥은 헛디디기 쉽다는 것. 거센 바람 속에 거목들은 휘어져도 잘만 자라지만, 뱃길과 바닷길은 맥없이 막혀 버린다는 것. 가끔 상점엔 라임이 떨어지고 택배는 오지가 않는다는 것을. 왜 제주의 모든 마을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서낭당이 있고 일만 이천의 신이 있는지를, 자연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전나비와 흰나비와 호랑나비가 수풀 속에서 각기 바쁘게 날아다니는 것을 볼 때. 들판이 억새로 물이 드는 것을 볼 때. 공원의 한구석에서 낮잠을 즐기는 동네 할망을 발견할 때. 태풍이 걷힌 후에 분홍색 노을이 지는 것을 볼 때. 도시에서는 알 수 없는 갓 딴 산딸기의 새콤달콤함을 맛보고, 윤기 나는 말들의 털 결을 만질 때. 검은 돌들과 푸른 바다의 대비를 한없이 바라보고, 없으면 없는 데로 라임 대신 귤을 짜서 마실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감사를 느낄 것이다. 두려운 존재를 알고 있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 배운 외경은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자연에 하나 되어 집어삼켜져 있다는 것을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제 떨고 있는 이방인에서, 위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제주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에는 이런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주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돌아온 여행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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