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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드라운 고슴도치 Dec 14. 2022

프롤로그

안녕 나의 미래? 잘 지내고 있지?


추운 날을 싫어한다.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날이 추워질수록 흔들리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년이 없는 삶. 내년이 없는데 내년이 닥쳐와서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을 들으면 자소서를 쓰고 있는 나의 뒷모습이 아른거리는 삶. 사실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유와 성장의 기회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걸 충분히 누리지는 못하고 늘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정을 좇아서 30대를 내내 헤맸다.


-고 싶다. 는  -지 못하다. 의 다른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안정되고 싶었는데 아직도 안정되고 싶다. 무엇 하나라도 안정되고 싶다. 유독 겨울은 춥고 매정하고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곤 했다. 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랬다고 했던가- 여기가 아닌가벼?-라고. 나의 열심은 어디로 증발했을까. 나의 열심한 삶이 얼어붙는 겨울이 10년째 오고 있다. 10년만 어렸으면 좋겠다. 그럼 좀 달랐을까. 하지만 이육사의 시에서처럼 한 발 재겨 디딜 곳 없어서 무릎 꿇고 주저앉을 수조차 없는 절정의 매일매일이 턱 밑에 짤짤 닥쳐온다는 게 나잇값을 못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일까? 소설의 5단계에 따르면 절정을 지나면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갈등은 해소되게 되어있으니까, 지금의 부침과 지침은 절정이 아닐까 싶어 힘이 풀리는 다리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힘을 주고 버티게 되는 시간.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의 애매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열심했으나 평범했기 때문에 혹은 애매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일까. 직업도 연애도 내가 안정되고 싶었던 그 많은 것들에서도 다, 유일하기에는 애매한 존재일까 나. 운명의 장난이 얄궂게도 일정기간 반복되면 나의 채찍은 나를 후려치곤 했다. 자꾸만 의심하고,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냥 그런 곳과, 그런 놈과, 그런 때였을지도 모르는데. 차가운 날들의 차가운 기억들에서 차갑게 오그라드는 피부에 나의 채찍은 야무지게도 감겨 상처를 남기곤 했다. 얼마간은 신께서 오만하지 말라고 그러시는 거겠지 했었는데 이제 오만은커녕 불면 날아갈 먼지 같아져서 추운 겨울바람이 두려운 것을. 그럼 포기해야 하는데, 다 포기했을 때 뭔가 오더라는 것에 아직도 얄팍한 희망을 걸게 되더라는 것을. 그래서 아직인 것일까? 다 포기하지 못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의 나는 잘 있을까? 미래의 내가, "이렇게 될 것을 왜 그렇게 힘들어했나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 길고 긴 터널 속의 불안한 나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빛 한 줄기도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서 더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바람에도 내가 얼마나 부치고 있었는지를 터널 안에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을 테니까. 지극히 내 이야기지만 어쩌면 제각기의 터널 안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느슨한 연대가 되기도 하고, 혹은 언젠가 내가 열심히 뿌리를 내리는 날이 온다면 터널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안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불안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


세상의 오만 것들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는 것은 좋게 말해서 시야가 넓어졌다는 뜻이고 아프게 말하면 그만큼 고통받아본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 고통의 영역을 어렴풋이나마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세상의 모든 것을 공감할 필요도, 시야가 너무 넓어질 필요도 적어도 자신을 위해서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일이 많다고. 지극한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삶은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고. 의심과 공감은 거친 삶의 흉터와 같은 것이라고.


상처와 흉터를 갖고 싶어 가지는 사람은 없다. 공감 잘하는 사람 될래 속 편한 사람 될래 하고 물으면 아마 지금의 나는  당연하게 후자를 고를 테다. 하지만 이미 고통받고 있다면, 그게 숙명이었더라면 고통받은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그 모양을 눈으로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결국 그 상처 위에 희망을 문신해내는 일을 하는 것이 내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기어이 터널을 탈출한 어느 날, 그 흉터 위에 새긴 희망으로 방황하고 있었을 과거의 나에게 위로의 말을 보낼 수 있기를. 이미 생긴 흉터가 오히려 좋을 수 있기를. 기어이 미래의 나에게 이렇게 될 것을 왜 그렇게 부쳤냐는 타박을 들어낼 수 있기를.


그래서 기록한다. 나의 터널 탈출기.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헤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들에게 느슨한 연대를 보내며.



혼란한 나야, 힘내. 좀만 버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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