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훈련
언어 습득의 기본이 일단 귀가 뚫려야 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런데, 젖먹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배운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영어나 일본어나 뭐가 됐든 외국어를 갑자기 듣게 되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옹알이를 하면서 한국말을 배웠던 그런 과정을 그대로
되풀이해야 한다.
즉 가랑비에 옷 젖듯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환경 속에 던져져서
매일 눈을 뜨면 영어가 들리는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이나 영국이나 어느 나라가 됐든
매일 영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모두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간접적으로 영어를 계속 듣는 환경을 억지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택하는 방법이
영어 방송을 듣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방법이다.
그래, 그리 틀린 길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CNN 뉴스를 시청한다고 하자.
일단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의 말이니 우선 외국인이 듣기에 빨리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고 등등을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것도 가장 효과적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나라 방송의 앵커나 기자들은 당연히 한국인 시청자나 청취자를 대상으로
뉴스를 전달한다고 생각하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일단 외국어 뉴스를 보고 듣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다음 문제는 지금 내게 말하는 앵커나 기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일단 모른다.
내용이라도 대충 이해하면 눈치로 때려잡을텐데.
미국에서 적응을 조금 해 나가던 어느 날, 기숙사 로비에 있던 TV 앞에 앉았다.
TV에는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현장 취재 화면이 나오고 그래픽으로 이라크 지도가 나오고 요란스러운 뉴스였다.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눈치로 이 뉴스가 무슨 내용을 말하려는지는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에 큰 글자로 Embargo라는 단어가 떴다.
그리고 앵커는 열심히 또 떠들었다.
그 단어를 처음 본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알지 못했다.
마침 기숙사 같은 층을 사용하던 호세라는 친구가 내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예의 미국인, 특히 캘리포니아 사람들처럼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보통 학생들의 인사는, “What’s up?”으로 간단히 시작됐고,
“Good”, “Fine”, “Not much”라는 식의 별 의미 없는 답으로 마무리됐다.
호세의 인사 후 나도 감흥 없는 답을 하고 속으로 망설였다.
저 단어의 뜻을 물어볼까 말까.
호세는 뉴스를 보며 뭐라고 떠들었다.
대충 짐작하기에는 전쟁을 시작한 이라크를 욕하는 듯이 들렸다.
용기를 냈다. 그리고 물었다.
“Jose, what’s the meaning of the embargo?”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 호세는 대답했다.
“Well, embargo means... A country like the USA encircles a country,
like Iraq, Cuba or even North Korea with military forces, and blocks
the country, that means making the countries really choke to death.“
아, 이해했다.
저 단어는 봉쇄라는 뜻이구나.
이 단어를 이해하고 나니 갑자기 뉴스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런 기분을 느꼈을 뿐이었다,
바로 그거였다.
무조건 외국어를 듣는다고 들리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단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 더 좋다.
듣기 연습이 무작정 외국어를 듣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려면 어휘력을 키워야 한다.
걸음을 걷지 못하면서 마라톤을 할 수는 없다.
듣기 훈련의 시작은 단어를 익히는 것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