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물선 May 23. 2024

LIFE?/UGOJESSE


남의 지혜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곧잘 본인의 SNS에 올리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림을 올리는 사람이나 그 SNS 포스팅을 읽는 사람들이나 대부분 인물들이 디디고 있는 '사물들'이나 시선이 향하고 있을 '풍경'에 눈이 가겠지만 실제 살펴봐야 하는 건 이 대상을 보는 주체로서의 우리 의식이다.


이 그림은 굉장히 강한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독해로 유도되는 인식의 고랑을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림을 구성하는 평면적 구도가 계몽적인 메시지를 구성하고 있는 듯 읽히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통창 너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왼발과 오른발로 적절한 높이의 '돈'과 '책'을 디디고 균형을 유지해 올라서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돈'만으로도 안되고 '책'만으로도 부족하며 아무것도 없이는 당연히 안된다는 뭐 그런 얘기.


그러나 조금 주의 깊게 그림을 살펴보는 사람이거나 반골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LIFE'라는 노골적인 태그, 두 번찍힌 작가의 인스타계정. 복제된 가능 주체를 드러내는듯한 동일한 옷과 체형,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익명화된 뒷모습,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사형수를 연상케 하는 뒷짐을 진 대상들의 모습은 삶 자체와 작가와 관람자 자신의 의식이 대상화되는 오래된 예술적 테마의 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풍경의 그림자와 인물들의 그림자 방향, 의도된 녹색톤의 기호적 지향성, 풍경에 대한 맹목적 방향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 논할 만한 사항이 많다.) 즉, 계몽적 독해 그 자체가 대상화된 삶으로 드러나는 욕망의 발로라는 인식을 그림과 그림을 보는 관객, 작가의 삼항 관계를 통해 드러내는 구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마 자기만족적 독해의 추가적 층위의 하나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실제 흥미로운 지점은 이 그림을 보는 우리의 의식이다. 그림을  계몽적 시선으로 이해하는가 아니면 후술 한 삼항 관계의 독해 차원에서 이해하는가. 그건 사실 그림에 대한 개인의 성의나 이해 차원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주체 욕망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앞서 잠시 언급한 그림 속 인물들이 바라보고 있거나 바라봐야만 하는 '방향' 혹은 '풍경'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강하게 메세지화 되어 구성된 그림을 보는 경우 그림 각각의 구성요소 간 내적  인과적 연결성을 납득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즉, 내러티브와 그 구조를 일차적으로 수긍하는 순간 내적인과를 사전조건화해 버리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은 일차적으로 수용된 메시지의 무화나 부정을 시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과 같은 경우도


A: '잘살려면 돈과 지식의 균형이 필요해' 

라는 의식화된 메시지가 하나 발생하고 이에 대해

A': '그림의 다른 여러 요소를 보았을 때 오히려 그런 메시지라기보다는 대상화된 삶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촉발하는 풍자적 그림인 거 같다'라는 판단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이는 구성 요소의 기능적 지향성, 이 경우는 '풍경은 과연 그림의 인물들이 바라봐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인물들은 과연 저 풍경을 보려고 하는, 즉 선호의 의도로 저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은 맞는가?' 하는 질문이 우선적, 기본적으로 촉발되지 못하게 만든다. 은폐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이 지점에 중대한 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답은 어차피 모른다. 그것은 그림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이쿠/마츠오 바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