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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연재 Apr 01. 2022

그냥 살아 즐겁게

 日好又日好

0.7% 차이로 대한민국 20대 대선의 결과가 결정되었다. 역대급으로 회자될 근소한 차이는 한쪽에서는 희망의 환호를,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절망의 탄식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앞으로 지나친 감정 대립보다는 성숙한 민주주의 안에서 위대한 대한민국이 더욱 희망찬 미래를 만들기를 바란다. 어쨌거나 역사는 흘러야 하고 국민은 살아야 하지 않는가? 20대와 50대가 함께 모여 사는 우리 집에서도 비슷한 희비는 동일하게 교차했다. 그래도 서로 웃고 잘 지낸다.


둘째 아들이 올해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 고3 수험 생활과 재수까지 한 터라 요사이 만끽하는 20살의 자유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난달에 큰 아들도 해병대를 무탈하게 마치고 복귀했다. 집에 온 그날부터 매일 매일이 약속이다. 얼굴 보기가 어렵다. "아빠, 차 빌려 줘, 친구들이라 바닷바람 쐬러 가기로 했어." "헐~ 또 차 빌려 달라고, 아무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어떤 때는 며칠간 두 아들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기도 한다.


20대의 대한민국 두 청년이 행복하니, 덩달아 나도 행복하다. (아프니까 청준이다 누구라도 이런 말은 제발 좀 안 했으면 한다.)


"아빠, 어떤 동아리 들까? 주짓수 할까 아니면 농구 클럽 할까, 자전거 동아리도 좋아 보이던데..."

"아무거나 해! 좋아하는 거 하면 된다. 애매하면 한번 해보다가 선택해도 되고"

 "근데 너 자전거 동아리 하면 XX 톡 뛰어나오는 타이즈 입을 텐데 괜찮겠어?"

대략 이런 수준의 대화가 저녁 식탁 자리에서 오간다.


뜬금없지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철학자 장폴 샤르트르의 말이고 요사이 자주 되뇌는 말이다. 너무 익숙한 문장이지만, 속 뜻은 잘 모른다. 그러다가 이 생각 저 생각했고, 얼마 전 리더들이 참석한 회사 미팅에서 몇 가지 살을 덧붙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도 그렇고 회사도 모두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지. 당연한 거야. 왜냐하면 소중한 존재로 태어났다고 믿고 싶어 하니까? 그래야 좋잖아. 기업의 존재 이유를 이야기할 때 사회적 가치니 공동체의 생존이니 이런 얘기들을 해. 아주 좋은 얘기야. 나도 그런 걸 절대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는 회사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선은 생존해야 해. 생존해서 돈을 벌어 매출을 일으키고 직원들 월급을 제 날짜에 준 다음에야 뭐 다른 거창한 걸 생각할 수 있거든. 내가 보기에는 살아가야 하는 그 당면의 문제를 직시해서 보고 그냥 사는 것, 그것이 실존이 아닌가 싶어. 그리고, 본질이라는 문제는 실존이 해결된 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 아닐까."


얼마나 내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잘 이해 못 하면서 하는 얘기이니. 얼마 전 어느 퇴역한 장성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국가와 민족을 구한다고? 웃기지 마, 우선 네가 자고 난 이부자리나 먼저 개" 이 말이 진정한 실존의 의미를 제대로 축약한 건 아닌지. 나름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보면 웃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샤르트르의 말을 이렇게 잘못(?) 이해하고 살고 있다.


'존재 이유' 나도 답을 알고 싶다. 이 질문에 끝없는 고민하고 연구하고 정진하는 분들의 삶에 대해서, 나는 일말의 부정도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오랜 기간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질문에 대하여...,

집에는 분양받아서 키우는 구피가 몇 마리 있다. 주로 둘째 아이가 키우는데, 때가 되면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환수해주고 어항을 깨끗이 씻는다. 구피가 사는 어항이라는 생태계 시스템(?)을 한 인간이 신처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원래 다른 종과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지니 훨씬 자신을 더 거창할 수 있게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더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개인이라는 존재는 사실 구피만도 못한 것이 분명한 팩트이다. 어느 자료에서  말하기를, 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모래알의 개수보다 우주의 태양 개수가 더 많다고 한다. 행성도 아니라 별이 그렇다는 말이다.


언제 적인가 강화도의 동막해수욕장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본 적이 있다. 해수욕장 한켠에 무심코 버려진 작은 돌멩이 조각을 보다가 상념(?)에 빠졌다. "돌멩이 한 개보다 더 작은 곳에 나는 아등바등 거리며 살고 있구나."

 

개인적으로 철학에 대해서는 사실 무지하며 별 관심도 없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 자신의 주변을 인식하고 살아간다. 나 --> 가족 --> 회사 --> 국가 --> 민족 --> 지구 --> 우주.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유가 향하는 범위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며, 이러한 인식 차이는 분명 개인의 삶의 모습을 바꿀 것이다.


아무튼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할 재주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부정을 하던 어떻던 주변 환경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은 주어질 뿐 감정이 없다. 어떨 때는 잔인하고 어떨 때는 너무 포근할 수도 있는데, 이 또한 개인이 느끼는 인식의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인식일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살, 외면, 반항, 막연한 희망. 아마 선택할 수 있는 답과 저마다 당위성도 차고 넘칠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

누구나 아는 시구이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움트는 생명의 입장에서 땅과 주어진 환경은 아마도 지독히도 잔인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움트는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경이로움을 느끼는가? 보기 나름이다.


호호야, 인생은 짧고 공평하게도 모두에게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있단다. 만약 신을 믿는다면, 내가 집에서 키우는 구피 같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신이 나의 시작에서 죽음까지를 모두 예비해서 완벽하게 보살펴 주지 않을까? 걱정할 게 없는 거지. 만약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라면, 굳이 괴롭고 회피하고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짧은 삶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그러니, 오늘 즐겁게 또 내일은 더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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