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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an 04. 2023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말년 - 2

망상의 끝

1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생모는 어떤 색채도 없는, 심지어는 글귀조차도 남기지 않는 그런 공계정을 만들어서 한국인들의 계정을 다수 팔로윙하게 되었다.


보통의 계정들은 일상이나 과거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은근슬쩍 직업이나 이성관계, 사는 곳 등등의 정보들을 흘릴 수밖에 없다. 특히나 본인의 커리어에 자부심을 가지거나 상업적 PR을 하는 사람은 대놓고 프로필란에 전문직이나 고액 연봉의 직업 같은 걸 기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기도 할 테고.


나르시시스트인 엄마의 그 얕디 얕은 통찰력과 바깥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그런 물질 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은 사진 기반 소셜미디어가 완벽한 사람들만 모아 놓은 장소라고 착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본인 말로는 자기가 현실에서 보는 구질구질한 인간들과는 급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다. 시각을 자극하는 사진과 현학적인 문구들로 ‘소통‘을 하는데 능란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화려하거나 여유로워 보이는 일상은 서민의 라이프스타일과는 몇만 광년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겠지.


해외 5성급 호텔에서 멋진 뷰를 보며 조식을 먹는 것이나,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시골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몇 개월을 취미로 글 작업을 하며 살 수 있는 여유를 보여 준다던가, 기념일 날 배우자에게 근사한 식사와 다이아 박힌 주얼리를 선물하는 그런 로맨틱 한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팅들. 널린 게 이런 포스팅이라 무시하고 넘어갈 만도 한데 평생을 이런 삶을 구경조차 못해본 60대 초반 여자에겐 이런 게 엄청난 자극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자기가 꿈꿔왔던 그런 이상형들이 즐비했기에 수시로 앱을 확인하며 그들의 글들을 저장하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세 달 남짓밖에 안 걸렸다. 딸인 나에게도 주저리 널어놓는 이야기 속엔 소셜미디어 속 특정 남성 A, B, C의 어떤 점들이 매력적으로 보였는지에 대한 디테일로 가득했다. 참고로 엄마는 싱글맘이 아니다. 남편이랑 버젓이 같이 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SNS는 엄마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습은 철저하게 숨긴 채 맘에 드는 이성 상대를 마치 장바구니에 담듯 차곡차곡 모아서 팔로윙을 할 수 있는 데이팅 사이트 같은 곳이었다.


아주 초기에 엄마가 이 포토 SNS에는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하다 얘기했을 땐 얼마나 자신의 삶과 그 주변이 형편없이 느껴졌길래 이역만리 한국땅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동경하나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이성에 대한 뒤틀린 욕망이라는 걸 알게 될 줄이야.


하루는 나에게 캡처한 SNS 화면을 보여주며 이 남자가 자신을 흠모하는 거 아니냐며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등단 한지 얼마 안 된 시인의 글이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아니지만 지나간 옛 연인을 꽃에 비유하는 진부한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누구인지도 특정 짓지 않는 시 한 구절 일 뿐이란 이야기를 했지만 본인은 이 남자가 자신에게 강력한 암시를 준다고 제차 이야기를 했다. 증거라면서 내게 꺼낸 화면 캡처들은 그냥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나 습작 같은 글들이었다. 이 사람에 대해 더 탐구를 해봐야 한다며 나에게 한국 인터넷 서점을 통해 그가 출판한 책을 모두 다 오더를 하라고 득달을 하는 바람에 한 묶음 구해다 준 적도 있었고.


이 외에도 중년의 변호사 남성도 자신의 레이더 망에 걸렸었다. 분명히 중년의 평범한 유부남으로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팅이 주된 거였다. 하지만 엄마 눈엔 이 사람도 자신 같은 여자에게 한눈을 팔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이며 이미 자신이 그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읊기 시작했다. 그 증거 즉슨 올리는 사진 포스팅의 배경 그리고 사진에 잡힌 화려한 물건 같은 것이 가정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암시하는 것 이라나 뭐라나.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엄마의 이 광기 어린 망상이 불이 붙은 계기는 이 남성이 호주에 왔을 때 사진을 올렸을 때다. 자신을 보러 왔었던 게 아니냐며 나에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꺼낼 때 정말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뭐 이외에도 엄마는 이 시기에 매일 같이 흘리는 말로 ‘자신이 남자만 잘 만났어도 인생이 이렇게 까지 꼬이지 않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냐는 뉘앙스로 ’다시 재가를 갈까 ‘라는 농담들을 자주 했었다. 갑자기 왠 주책인가 싶었지만 지금 보면 진짜 온라인상의 남성들을 골라서 대시를 하면 자신에게 넘어올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시기에 이미 남성들이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고 그 단서들을 포스팅에 다 숨겨 놨다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던 거 보면 망상이 더 심각했을 수도 있고.


몇 개월 이후 나는 엄마가 노래를 부르던 내 집 장만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부모의 불화에 멘붕이 와서 집을 떠나고 그들과 서서히 인연을 끊었다. (집만 있으면 가정이 화목해질 거란 헛소리를 하면서 종용을 했더랬었지.)


집을 떠나고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장문의 문자가 내 스팸박스에 쌓이기 시작했다. 개월수가 지날수록 그 내용은 이모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었다. 전화번호를 차단하기 전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서 엄마는 내 안부는 어떤지 자신들의 상태는 어떤지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이모가 자신이 인생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훔쳐가 버렸다면서 그 요망한 것이 내가 점찍어 놓은 남자를 몰래 한국에 가서 만나고 꼬셔서 자신에게서 뺏어 갔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수신자 숨김까지 해가며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게 괘씸해서 그 이후로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그 후로 이모와 그 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욕문자와 사이버 스토킹 같은 걸 했나 보다. 그 딸에게 까지 저주 문자를 퍼부었는지 그 딸이 그 캡처를 나에게 보여주더라. 그 시기에 나는 치료과정 중 제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경찰에 신고하고 전화번호를 바꾸던가 아니면 접근금지 신청을 하는 방법을 알아보라 했더니 이모란 여자는 갈갈 히 날 뛰면서 나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된 거라면서 그 여자 다운 말을 했다. 나에게 ‘네가 엄마를 떠난 건 잘했다.’ 라며 운을 띄운 건 본인이면서 내가 마치 엄마를 정작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시킬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쌍팔년도 인권 유린되던 시기도 아니고 호주에선 자발적이 아닌 이상 강제입원 자체가 안 되고 엄마란 인간이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인지라도 하고 있겠는가. 같은 시기에도 돈계산은 빠삭해서 나에게 환불받아 달라는 문자를 스스럼없이 보내는 여자이고 워커홀릭처럼 일을 다니는 인간인데.


이모란 여자에게 일침을 날렸고 그렇게 끝났다. 머리를 굴릴 수 있으면 엄마란 사람이 이상하다는 낌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이 이역만리타국까지 와서 차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끌어들인 건 당신네들 아니잖냐란 말을 했었다. 우월한 위치에서 엄마 같은 염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베푸는 그런 구원자 놀이를 하는 여자였으니까.


그 이후에 엄마랑 집 문제로 송사가 있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어오는 이야기를 보면 밖으로는 멀쩡히 경제활동은 하고 다니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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