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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Jan 31. 2023

리코

다랑논 이야기

내 이름은 리코 이다. 


5살 이고 한국에 온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6.25전쟁이 끝나고 우리가족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이 곳 산청으로 왔다.

정확히 이 동네 어디쯤이란 말 만 들었지 정확한 위치와 동네 이름을 잘 모르던 아버지는 며칠을 해매다가 이 마을 신촌 으로 들어 왔다.     

신촌 마을 로 들어 올 때 장터에서 만난 영자네 아버지가 이 지역 사정에 대해 잘 설명해 줬다고 했다.

영자 아버지는 신촌 사람이었다.     

고향이라고 돌아 왔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조선 사람의 서러운 타향살이에 한을 않고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한국에서의 첫밤.

영자네 아버지는 자기네 집 부엌 옆에 벽 하나 두고 있는, 방 이 라기도 무엇한 공간을 내어 주었고 

아버지, 엄마, 오빠, 나 네 식구는 조선에 온지 꾀 많은 시간이 지나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잠을 자는 첫날 이였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에서의 첫 기억은 아궁이 연기가 가득한 부엌 흙바닥이다.     

한국의 겨울은 일본의 겨울보다 더 춥고 차가웠다.

하지만 눈을 좋아하던 나는 해만 뜨면 눈밭을 구르고 다녔는데 

영자는 이런 내가 강아지 같다고 했다.

산으로 난 좁은 길을 올라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이 밟을 때 마다 “뽀드득” 재미난 소리를 내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겨울은 추위에 얼어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짐승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여러 달을 지나고 나서야 점점 눈이 녹기 시작했다.     

비탈길이 길게 늘어져 있고 마주보는 높은 산을 보면 깊은 산중에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눈이 녹은 봄에 처음 본 신촌 마을을 잊을 수가 없다.     

겹겹이 있는 다랑이 논들은 손바닥만 하게 옹기종기 나눠져 있었고 듬성듬성 보이는 큰 바위덩어리는 위태롭게 동네를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아버지는 영자네 에서 좀 떨어진 터에 흙과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빈 터 하나를 구해 여름이 되기 전 집터에 흙벽을 완성하셨고 영자네 집에서 나왔지만 지붕을 이을 볏짚 살 돈이 없어 하늘이 보이는 땅 위에서 여러 날 잠을 잤다.

아버지는 장마가 오기 전 어렵사리 볏짚을 마련해 지붕을 이으셨지만 볏짚을 적게 이어 장마 내도록 비가 새는 방에서 잠을 자야했다.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아버지는 남의 집 품앗이를 나가시고 엄마는 가을이 지나 기전에 여동생을 낳았다.     

작고 이뿐 동생이 신기하고 너무 좋아서 100일도 지다기 전에 업으려고 하다가 여러 번 방바닥에 떨어트렸다. 

엄마는 논에 품앗이 나갔다가 낮에 집에 들려 동생에게 젖을 물리곤 했는데 동생은 하루 종일 울기만 했다.

여동생의 울음소리를 겨울 내도록 듣고 나니 엄마보다 내가 더 동생을 잘 돌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해가 지고 동생이 우는 것을 싫어 하셨고 엄마는 동생을 업고 저녁 마다 빨래를 하러 나가셨다.

빨래라 할 것도 없고  물에 행구는 것이 전부지만 엄마는 저녁마다 빨래터로 나갔다.     

아버지는 일을 많이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논 때기 하나 없이 남에 집 품팔이만 하니  빨리 돈을 벌어 논을 장만하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 셨는데

아버지의 꿈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비탈길의 산촌마을인 신촌 마을은 마을주변에 농사짓기 좋은  땅은 다들 주인이 있다지만 그 외에 산으로 올라가는 있는 자갈밭은 주인도 없는 땅이 많았고 마을의 어른들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은 아버지는 집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자갈밭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내가 8살 되던 해 아버지는 그 땅에 처음으로 모를 심으셨다.

돌이 많은 땅이라 손으로 땅바닥에 돌을 들어 내어가며 모를 심었다. 

비가 오면 흙이 흘러 내려 돌담을 쌓기로 하신 아버지는 해가 지는 밤이 되면 돌담을 쌓기 위해 논으로 나가셨다.     

달이 밝은 날은 대낮 같이 밝아 낮에 일하는 것 보다 훨씬 수월했다. 아버지는 큰 돌을 옮기시고 엄마와 나 그리고 오빠는 논바닥에 손을 넣어 돌을 주워 냈다.     

한번은 어둠속에 가려낸 돌멩이를  모르고 옆 논에 버리는 바람에 엄마의 머리채가 날아갈 뻔 한적도 있다. 아무리 어두워서 잘 안 보여서 그랬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산 위에 농사짓는 사람들은 논에서 돌을 가려내느라 긴 여름해가 끝나고 밤이 되어도 집으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마을아래 논 꾀나 있는 부잣집 아저씨가 우리 논 위에 논을 만든다고 한 뒤 아버지는 더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막걸리라도 한잔 드신 날이면 아버지는 꼭 논두렁에 앉아 노래 한곡 부르시고 집으로 들어오셨는데

내가 논에서 돌멩이를 많이 주워낸 날이면 환하게 웃으시면서 “아부지는 이 논이 제일 좋다”라고 하시곤 했다.

자식 듣는데 자식보다 논이 좋다고 하는 말이 지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땐 아버지가 나를 보고 “네가  좋다”라고 하는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누가 떼어갈 일도 없는 논을 밤낮으로 돌보고 계셨다.     

10살쯤 되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학교에 갈 나이가 지났다는 것이 이었다. 저 아랫동네 까지 통틀어 학교에 다니는 여자 아이가  한명 있었는데 희주였다.

희주네 아버지는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절대로 자식들을 논에 내보내지 않는 양반 이였다.

그 집은 희한하게 희주 할머니가 아이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안가고 있는 것 보다 희주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영자도 그렇다고 했다.     

영자도 동생이 있었는데 남자아이였다.

동생들이 서너 살이지나 서로 업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지자 영자와 나는 동생들을 방에 두고 잠시 빨래터에 다녀온다는 것이 저녁 해를 넘겨 버렸다.     

영자와 나는 저녁때 가 한참 지나 집 앞에 어슬렁거리다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네가 잘 보이는 다랑논으로 갔다.

별은 없었지만 달이 밝은 밤이라 길이 훤하게 보여 무섭지는 않았다.

영자는 자기네 논을 가리키며 “우리 논 잘 있네. 했다.

영자네 논보다 좀 더 올라가야 있던 우리 논까지 둘은 걸었다. 우리 논이 보이자 나도“우리 논도 잘 있네.

그 소리가 나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물동이를 이고 집에서 나왔다. 어제 일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심하게 꾸중을 들을 테니 이럴 땐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상책이다.

냇가에 나가자 영자가 씩 웃으며 물을 길고 있었다, 물동이라도 이고 들어가야 야단을 덜 들을 것 이라는 생각이 통했다.

영자와 나 말고도 물을 길러 나온 아이들이 서너 명 더 있었다.

물동이를 이고 집에 들어서자 엄마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침상을 내 놓았다.     

논농사를 지으면 매일 쌀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몇 해가 지나도 보리밥만 먹고 있다. 영자네 는 올해 제삿날 쌀밥을 먹었다고 했는데 우리집은 한번도 쌀밥을 한 적이 없다.     

영자와 나는 갈피를 모으러 산에 올라가곤 했는데 산이 높아도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에 갈피도 모으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낡은 치맛자락을 여민 넓은 천 조각에 갈피를 모으며 정신 없이 놀다가 시간을 흘려 보내고 나면 나이가 어린아이들은  갈피를 많이 모으지 못해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울기도 했다.     

오빠는 학교에 갔지만 오빠 또래의 남자아이들 중에도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도 많았다. 

남자 아이들은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남자아이들이 짓궂게 뱀이라도 잡아오는 날이면 여자아이들 놀려대며 뱀을 주물럭거리다가 뱀이 힘이 빠져 축 쳐질 때 까지 온동네를 누비고 다였다.

뱀은 꼬챙이에 끼워 구워 먹었는데 영자도 나도 뱀을 먹어보지는 못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남자 아이들이 모이면 내심 한 마리 얻어먹을려고 뒤를 따라다녔지만 아무리 따라 다녀도 얻어 먹을 수가 없어 오빠에게 말했더니 꼬챙이에 서너 마리 잡아줘서 영자랑 몰래 먹었다.     

모심기가 끝나고 더위에 지쳐 있을 때 쯤 아버지도 개구리를 많이 잡아 오셨다. 솥에 물을 붓고 오래 끓이면 뽀얀 국물이 우려 나왔다.

그 국물 한 그릇 얻어먹을려고 나는 물을 부지런히 길러왔다.     

12살이 되자 물을 길고 뽕잎을 따고 나무를 하러가는 일이 수월해 졌다.

논도 서너 군데 늘어나 아버지의 부지런함이 최고도에 이르렀다. 몇해가 지났지만 아버지가 만든 논은 돌이 많았고 엄마와 나 동생들은 돌을 주우러 논으로 나갔다. 맨손으로 돌을 주워내니 손가락이 성할날이 없었고 지난해 아버지는 큰 돌에  손가락이 찍혀 곪아 오르더니 언젠가 부터는 손가락 하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논들이 촘촘히 들러붙으니 주운 돌멩이는 더 멀리 내다 버려야했다.

높은 벼랑까지 가서 돌을 비우곤 했는데 비우러 가는 길에 걸음이라도 늦게 걸으면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손으로 쌓아 올린 다랑논이 많아질수록 봄이 되면 논에 물 데기 전쟁이 였다.

이 전쟁은 자칫 집안싸움으로 커지기도 했고 동네 싸움이 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물 때문에 대판 싸움이 나야 비가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길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 일에 날이 서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모내기 때가 되면 대부분 학교를 가지 않았고 모를 먼저 심는 순서에 따라 등교 순서가 정해졌다.     

14살이 되던 해 어김없이 가족 모두 나와 모내기를 했다.

봄볕도 얼마나  따가운지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동생들은 게으름을 피웠지만 왠지 나는 그러면 안 될 것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붙는 거머리를 때가며 하루 종일 식구가 다 나와 모를 심어도 논에 모를 다 심으려면 한달이 넘게 걸렸다, 다닥다닥 붙은 논에 모를 심으러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오면 서로의 논을 쳐다보며 서로의 논 사정을 살피고 식구가 많은 집들은 식구가 적은 집들에 비해 모내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때쯤에 나온 말인 듯 한 부지깽이도 모심을 때가 되면 할 일이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때였다.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꽁꽁 숨겨 뒀던 쌀을 꺼내 엄마는 쌀밥을 지어주셨다.     

모를 심어둔 논에 물을 채우는 일이 어려울 때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 6월 이였는데 하늘에서 비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말라죽는 모가 많았다.     

7월쯤 장마가 오면 아버지는 장마철에 물 빼기를 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밤이 늦도록 비를 맞으며 논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두운 저녁 천둥이 치고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방에는 물에 젖은 옷에서 쉰내가 진동을 하고 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집채라도 삼킬 듯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잠을 자다 말고 논으로 나가셨다.

냇가에 범람한 물소리가 바위를 치는 듯 요란했고 엄마는 나가시는 아버지를 말리시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흙길에 물이 넘쳐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돌아 오셨다고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센 아버지는 빗소리가 땅을 치는 아침 해가 밝자 심각한 표정으로 논에 나가야 한다며 집을 나가셨다.

오후쯤 비가 잦아들자 오빠랑 나도 논으로 나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논의 형태는 보이지도 않았고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산에서 떠밀려 내려온 토사가 논을 덮었다.

영자 아버지와 우리아버지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있었는데

논을 쳐다보고 있던 엄마는 결국 대성통곡을 하셨다. 오빠는 울지 않았지만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면 엄마는 주먹밥을 만들어 논으로 갔다.

엄마는 논으로 들어온 흙을 퍼내고 아버지는 무너진 돌담을 쌓아 올렸다.

흙범벅이 된 몸으로 엄마는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말 한마디 할 힘도 없이 바로 잠이 들었다.

해가 뜨면 오빠와 나도 논으로 나가 아버지를 도왔지만 그런 우리를 보고도 아버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토사가 흐르지 않는 논들은 모가 자라 푸릇푸릇 보였고 우리 논부터 위로는 물이 질퍽한 흙만 차 있었다.     

아버지는 햇볕에 그을리고 잘 먹지 못해 다리가 비쩍 말라 갔다.

하늘 원망, 한번쯤은 할만도 한데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가끔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여름의 끝자락 저녁밥을 먹으러 식구들이 다 둘러앉았다. 아버지는 밥을 반쯤 드시고 남기셨고 동생들은 아버지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다투고 있었다.

어느 정도 돌담은 다 쌓아 논의 형태를 갖추었으니 내년에 농사는 짓겠지만 장마에 쓸려간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듯 보였다.     

다음날 아침 늦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깨 어렴풋이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장지문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어보니 아버지가 마당에 반듯하게 누워 얼굴로 비를 맞고 계셨다.     



14살 되던 해 늦여름 아버지는 흙탕물 가득한 마당에 반듯하게 누워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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