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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의 다온 Aug 02. 2023

경로를 벗어나야만 마주치는 풍경들

제주도 동부 구좌읍 홀로 여행기

긴 밤을 지킨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이 별처럼 찍혀 있는 바다. 물결은 잔잔했고, 수평선에 닿은 하늘만 붉게 물드는 중이었다. 그 곁을 수줍음 많은 구름 떼가 지나갔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우리의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태양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런 때가 있다. 문득 내가 여전히 나인지 의문이 들고, 삶이 낯설게 느껴질 때. 꼭 그랬을 때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3년간 만난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오랫동안 방치해 둔 나와 이제는 화해하고 싶었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은 나의 오랜 refresh 방식이다. 완전히 낯선 경험들 속으로 뛰어들어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온전히 나의 존재 안으로 배어든다. 그때의 여행도 그랬다. 제주도는 익숙한 여행지였지만, 동부를 제대로 여행한 적은 없었다. 이동 수단은 전기자전거를 택했다. 자전거를 타본 경험 자체가 손에 꼽히는 만큼 꽤 과감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홀로 여행길에 올랐다.



제주도 동부는 성산일출봉이나 바다 건너 우도 등 유명 관광지도 많지만, 무엇보다 평화롭고 아늑한 시골 마을들이 매력적인 지역이다. 구좌읍의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 이름마저도 사랑스럽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숙소만 예약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쩐지 마음껏 헤매고 싶은 여행이었다.


내가 머문 곳은 하도리. 버스 정류장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길은 넓었고, 양 옆으로 그보다 더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유난히 까만 흙 위로 고개를 내민 당근잎들이 드물게 지나가는 이들을 반겨주는 곳. 햇살이 머무는 들판은 초록빛과 황금빛 물결로 가득했다. 그 풍경들 너머로 색색의 지붕을 덮은 집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걷고 싶을 만큼 정겨운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바람에 스치운다'. 들판과 바닷가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집이다. 1층에는 바다를 보며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2층에는 역시 통창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거실과 방들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지만 1인실도 있고, 방마다 화장실을 갖춘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집도, 사람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공간을 갖는다.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던 나에게 꼭 알맞은 곳이었다.


이 여행의 인상을 한 장면으로 표현한다면 내 방 침대 옆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일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푸른 하늘과 바다가 보이고, 그 아래로 풀포기들과 돌담 사이에 피어난 꽃들이 손을 흔들던 풍경. 그 움직임과 바람이 실어오는 향기까지도 모두 담아 엽서로 간직하고 싶은 풍경이었다.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잠이 들었다. 거침없지만 부드러운 자장가에 꿈도 꾸지 않는 밤들이었다.




하도리의 가을밤은 7시부터 시작된다. 몇 없는 식당들도 대부분 7시에 문을 닫는다. 정류장에서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도보 15분 거리의 길에는 가로등조차 없었다. 먼 외딴집들의 희미한 불빛과 어쩌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첫날 도착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벌벌 떨며 날듯이 뛰어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가곤 했다.


이렇게 깜깜한 만큼 초저녁부터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는 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상도 마련되어 있었다.



마지막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 누워 쏟아지는 별들의 시선을 받고 있으니, 새삼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탁 트인 하늘은 포근한 어둠으로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왼편에는 너무 멀어 반딧불 같은 도시의 불빛들이, 오른편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환한 조명이 거기에 누군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별들은 흐르는 음악에 맞춰 이야기하듯 깜빡였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안주 삼아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비웠고, 기분은 더욱 들떴다. 그래서였을까. 맥주를 더 가지러 내려가니, 거실에서는 어떤 모자(母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 볼일을 보고 올라가려는데, 문득 어떤 충동이 나를 이끌었다.


"혹시 옥상에 별 보셨어요? 엄청 예쁘니까 꼭 한 번 올라가 보세요."


라고 냅다 말을 걸어버린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정말로 황홀한 풍경이라 누구든 봐야 할 것 같았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올라와 감상에 빠져 있을 때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함께 보자는 뜻은 아니었기에 조금 놀랐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휴가철도 아닌 10월의 평일에 관광지와 동떨어진 마을에서 혼자 여행 중인 여자, 그리고 단 둘이 여행 중인 어머니와 다 자란 아들. 이야깃거리는 많았고 밤은 짧았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 두 사람은 새벽에 일출을 보러 갈 계획이라며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제주도 동부 여행을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일출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전거를 타고 다녀보니, 어두울 때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등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자전거의 헤드라이트도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 아쉬운 대로 한낮에 성산일출봉을 보고 온 참이었다. 나를 끌어당긴 충동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새벽 5시의 도로는 상상 이상으로 어두컴컴했다. 다니는 차도 거의 없었고, 가로등도 드물었다. 그 길을 1시간 동안 자전거로 달릴 생각이었다니. 새삼 나의 용기와 뜻밖의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성산일출봉에 도착했을 때도 하늘은 아직 새벽별로 가득했다. 절벽 위 솟아오른 바위는 아가리를 벌린 맹수처럼 보였다. 그렇게 아직 어둡고 험한 길을 뚫고 정상에 도착한 그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떠나왔다는 것,
기어이 거쳐가야 할 순간에 다다랐음을.



낯선 풍경 앞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그리며 기다려왔던 장면을 마주한 느낌. 삶의 목적지를 잃고 한참을 헤매다 도망쳐 온 여행이었다. 하지만 삶은 경로를 이탈하여 우연히 도달한 바로 그곳에 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여기까지 다다르는 모든 여정을 함께하며 조용히, 때로는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은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다. 점점 더 붉어지는 하늘이 거기에 해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요히 그 정경을 바라보며 각자의 바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둥근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다가 환영하듯 출렁이며 금빛 윤슬을 띄우고, 태양이 가로질린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은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왔다.




같은 장소라도 거기에 이르는 여정은 모두 다르다. 무수한 풍경과 사람들을 스치며 나아가는 자신만의 여정. 그 길 위를 홀로 헤매다 때론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 나만이 알던 모퉁이에 데려가기도, 혼자는 찾을 수 없던 장소를 발견하기도, 길 아닌 길을 함께 만들기도 하며. 그러다 각자 보고 싶은 풍경을 찾아 또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게 하나의 풍경 속에 무수한 이야기만 남는다.



세상에 오직 나만이 아는 여정. 그 모퉁이에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가 생겼다. 하도리의 내 방, 마을에서 유일하게 8시까지 열던 바닷가 앞 식당, 그곳으로 향하는 길들, 뜨거운 태양 아래 마른오징어가 춤추고 미역 줄기가 끝도 없이 널려있던 해안가 자전거도로, 3평 남짓의 종달리 무인 책방, 왕복 1차선 산길에서 발견한 꽃밭,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말 한 마리가 서있던 작은 들판, 비를 맞으며 오르던 오름 … 모든 풍경들이 눈을 감아도 선연히 떠오른다.


언젠가 다시 삶이 낯설어질 때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는 곳. 그런 장소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때의 기억만으로도 삶이 살아진다. 두려움은 가라앉고 기꺼이 헤맬 용기가 생긴다.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을 함께 견뎌왔으며, 마지막까지 내 곁에 존재할 나의 유일한 구원자인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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