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에서 내려올 때
조증의 얼굴을 처음 봤다. 마냥 좋기만 한 나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막 힘을 내서라고 생각했다. 함께 살던 하우스메이트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다시 혼자 살게 되면 그때처럼 힘들고 외롭고 슬프고 화나고 괴로울까 봐 꽤 걱정하고 있었다. 하우스메이트가 나가자마자 집에서 차려 먹는 식사 일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잡곡밥과 김치볶음밥만 하고, 반찬과 국은 엄마에게서 얻었다. 아직도 엄마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지만, 얼추 3달 정도가 되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된장국을 끓일 수 있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자랑스럽기도 해서 거의 매일 SNS에 나의 식생활을 업로드했고, 사람들이 응원하고 좋아해 주었다.
겨울이 돼서는 떡국떡을 가지고 로제소스, 된장, 쌈장, 김치, 고추장 등등의 소스를 사용해 떡국이나 떡볶이를 해 먹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은 과거에는 1년에 5번도 될까 말까였다. 매일 배달시키거나 나가서 음식을 사 먹었는데, 이제는 사 먹는 일이 없다.
생활력에 자신감이 붙고 신이 났다. 식사와 수면 관리를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해보려고 했고, 잘됐다.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가득했다. 비참한 마음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마침 완수해야 하는 지원사업이 있었고, 그 일을 천천히 생각하던 중 12월에는 동료의 온스테이지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난 기분은 더해졌고, 연말 연초 분위기도 더해졌다.
2023년에 출간을 생각 중인 글 일이 두 건이 생겼다. 2023년은 이렇게 글로 보내겠네, 하다가 봄에 싱글을 내고자 기획하며 음악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사실 컴퓨터로 만든 음악은 딱딱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만든 컴퓨터 음악'이 딱딱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든 힌트라도 조언이라도 얻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 힌트를 얻어보려는 노력은 과거에도 했으나 감을 잡을 수 없었고 작업할 수 있는 에너지도 없었던 듯하다. 비로소 에너지가 올라온 최근에서야 나는 내 감정과 생각, 내 취향을 들여다보는 근본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쉬운 길이 있을 줄 알았던 건 아니다. 너무 처음 보는 풍경이기에 어디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월/주/일/시간별 계획과 기록이 가능한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연휴 즈음부터 아무리 똑같이 생활해도 점점 졸리고 피곤하고 불안하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애리야, 너 최근에 잘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조증의 얼굴을 처음 봤다. 내가 조증의 얼굴을 봤을 땐 이미 조증은 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조증과 함께 놀면서도 조증이 맞는지 헷갈렸다. 그런데 이제 조증이 가려하니 확실해졌다. 조증이었구나.
안 그래도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지금 조증인가? 아니면 남들은 원래 다 이렇게 부지런하면서도 희망적으로 사나? 조증인지, 내가 너무 울증에 빠져있다가 평균(?)으로 돌아온 건지 헷갈렸다. '조증'을 검색하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3년 넘게 다니고 있는 신경정신과에서는 15분간 상담 시간이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지금 나의 병명이나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히 말해주기보다는, 1-2주간 있었던 일을 묻고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거친다. 처음에 갔을 때는 매일 울던 상태였다. 스스로에 대해 속상한 점을 말하며 울던 내게 의사는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했다. 많은 우울증 환자분들께서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계시다고.
의사와의 대화에서 조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던 때를 돌이켜본다. 두 번 있었다. 2020년이나 2021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음악 작업, 운전면허, 운동, 잘 챙겨 먹기 등 여러 가지 일을 해내고 싶다며 신나서 말하는 내게 의사가 함께 좋아하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하나씩 해나가는 것은 어떤지, 의견을 주셨다. 당시 강박증이 높았던 내가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틀어졌을 때 자책할 가능성이 높고 그게 걱정이 된다고 말하셨다. 당시 나는 기분이 올라와 여러 가지 일을 해내고 싶었으나, 이미 일을 처리하기엔 물을 너무 많이 먹어버려 기능이 고장 난 기계가 된 것 같았다. 한참 건조해야 그나마 삐걱거리며 제 일을 해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이번 몇 달간 기계에 기름칠을 열심히 해서 기계가 잘 돌아갔다. 그리고 삐걱.
두 번 째는 내가 직접 물어봤을 때. "제가 조증도 좀 있는 건가요?" "좀 있으시죠." 둘 다 웃으며 물었고 대답했다.
조증의 얼굴을 처음 봤다. 이번에 함께 놀며 왠지 조증인 것 같아 잠 자기 전에 약을 꼭 챙겨 먹었다. 마음이 뛰고 희망에 차 신이 나서 잠이 잘 안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잠을 하루라도 제대로 잘 못 자면 며칠이 힘들어진다. 컨디션 관리가 정말 중요하다.
스무 살 때, 한 공동체에서 "너 조울증 아니냐?"라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 너무 잘 울고, 너무 잘 웃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병원을 다니지 않았고, 그래도 어떻게 살아졌나 보다. 병원을 다니던 지인이 나보고 "너는 조울증 아니야. 진짜 조울증은 안 그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한참 올라갔다. 3-4달 주기. 내가 처음 인지해 본 나의 조증. 예전에는 잘 못했던 기본 생활을 계속해나가며 쭉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집에서 차려먹는 음식, 놀러 갔다가 찍은 특이한 장면, 즐겁고 매력적인 나와 친구들, 작업 장면. 그 사진들을 함께 올리고 싶으나 골라낼 힘이 하나도 없다. 너무 올라갔으니 이제 내려갈 차례인 것 같다. 생활을 계속해나가며 쭉 안전하게 내려가 안착하고 싶다. 너무 발산했으니 좀 아끼며 정말 필요하고 원하는 곳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졌다. 드디어 조증의 실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