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하는 전업주부(육아휴직) #8
'트니트니'
10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은 아이들 음악으로
꽉 채워진다.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 그런데 진수의 딸은
거기 없다. 체리는 진수의 품 안에서 비눗방울을
따라다니는 아이를 눈으로 좇는다.
- 체리야, 너도 저기서 놀아~
진수는 체리를 슬쩍 앞으로 밀어보지만,
체리는 다시 진수 품 안으로 들어온다.
체리의 눈길은 여전히 아이를 향해있고,
이따금씩 근처로 날아오는 비눗방울을
손을 톡 건드려본다.
- 체리, 문화센터에서 잘 놀았어?
- 아니, 내 품에서 안 떠나더라.
같이 놀았으면 좋겠는데, 사탕 줄 때만
선생님한테 가고..
- 체리는 시간이 걸리는 스타일이야.
'날 닮았나?'
진수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진수도 그러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진수는
태권도장에서,,
-진수야, 진수야. 중간으로.. 중간에..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있는데 진수 엄마는
진수에게 손짓한다. 진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애써 못 본 척한다.
'난 여기가 편한데..'
작은 덩치의 진수가 가장자리에 있는 게
진수 엄마는 못마땅했다. 결국 진수엄마는
무대 앞으로 나와서 진수를 중간으로 밀어 넣는다.
진수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한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자
진수는 손으로 머리 위를 휙휙 젖는다.
-생각하보니, 나도 어렸을 적 그랬던 것 같아.
심지어 세뱃돈으로 문구점에 장난감을
사러 갈 때도 혹시 친구가 볼까 봐...
그 주위를 얼마나 맴돌았는데.
- 왜? 이해가 안 되는데?
- 모르겠어. 그냥 장난감 사는 거
친구가 보는 게 부끄러웠어.
음,, 그냥 주목받는 게 싫었다고 할까?
그땐 장난감이 귀했잖아.
장난감 산다고 하면 친구들이
다 모여들고 그랬거든...
- 와~ 이해 안 된다..
민진은 슬쩍 진수의 표정을 보니
내가 이해 못 할 걸 아는 눈치다.
진수는 모태 'I'형이었고 그 성향이
체리에게도 보인다.
체리는 갓난아기 때부터 조심성이 많았다.
키즈카페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친구가 관심을 보이면 슬쩍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엄마한테 와서 그 친구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한참 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양보일까?
아니면 트러블이 싫은걸까?
진수는 다시 손으로 휙휙~ 젖는다.
'아직 어리니깐 앞으로 변화가 있을 거야.'
진수는 밥을 먹고 있는 체리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는다.
-아빠가 딸을 엄청 좋아하네요..
휴가 중이세요?
- 아,, 아니요. 육아휴직 중입니다.
- 아아~ 하하하하, 그러셨구나... 어쩐지.
아빠 육아휴직 처음 봤어요..
얼마나..
- 아, 10개월 썼어요. 와이프가 복직하면서
이어서 제가..
- 와,, 멋지네요.. 와이프께서 돈을 잘 버시나 봐요..
어색한 웃음이 오고 갔다.
문센를 다닌 지 2개월, 진수 혼자 남자였다.
진수는 같은 반 엄마들의 의심 어린 시선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진수는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엄마들과
말을 튼 것이다. 그 이후 엄마들은 체리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도 해주고, 자기 아이와도
연결해 주셨다.
'이제 나도 무리에 들어가는 건가?'
딱 거기까지였다.
내향적인 진수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고,
문센는 혼자 들어와서 가장 빨리 나갔다.
화요일, 목요일, 진수와 체리는 문센에 간다.
프로그램에 기대어보니 잠시나마 육아가
편해진다. 일단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시간도 빠르다. 기분 탓일까? 문센, 아쿠아리움..
진수는 문 밖 일정을 늘려간다.
-민진아. 오늘 문센 엄마들이 말 걸어줬어.
와~ 2개월 동안 말 한마디 안 한 것 같아..
처음이야..
민진이 뒤돌아보니 양념자국이 있는 축 늘어진
흰 티를 입고 있는 진수 얼굴은 노란 이를 들어내며
웃고 있다. 눈은 민진이를 보고 있는데
손은 체리와 놀고 있다.
-오빠, 엄마들이 뭐래?
-와~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나 봐?
한두 번은 올 수 있는데 2달 가까이 오잖아.
백수인가? 뭐 그런 생각한 거 같아.
근데 육아휴직이라고 하니깐... 다들 놀라더라.
그리고.....
민진은 고개를 돌려 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르면서 중얼거린다.
'오늘은 기분이 괜찮네..'
생각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민진은 몇일 전 일이 생각나버렸다.
-너무 힘들다고!!
나는 어디에 이야기할 때도 없잖아.
넌 조리원 동기라도 있지.. 엄마도 있고!!
난 누구한테 물어봐!! 너밖에 없어!!
진수의 전화를 받은 민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복도로 나왔다.
민진은 전화기 음량을 최대한 낮추었지만
스피커처럼 울리는 진수의 목소리를
우두커니 듣는다.
-왜!! 왜!! 육아휴직은 한다고 해서..
난 어디에 스트레스를 푸냐고....
진수는 멈추지 않는다. 뭐가 그리도 화가 났는지,
무엇 때문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이 순간만은 누구한테라도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 사람은 민진이었다.
육아휴직 3개월 즈음부터 진수는 폭발했다.
익숙하지 않은 육아였고 체리와 함께있지만 혼자였다.
민진이가 퇴근할 즈음 5시에서 7시까지가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그렇게 집에 온 민진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화를 낸다. 회사에서 여기저기 불려 다닌
민진이 한숨을 쉬면.. 진수는 폭발했다.
종잡을 수 없는 진수는 경계선에 있다.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폭발하고, 조금만 아래에 있으면 평온하다.
조울증? 민진이도 진수의 눈치를 본다.
진수가 기분이 좋으면 덩달아 좋고
그렇지 않으면 민진이도 한숨이 나온다.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기름을 붓는 격,
진수는 집을 나가버린다.
'쏟아내려면 집에서 쏟아내지..'
그렇게 나가버린 진수가 없는 집은
민진과 체리는 일상이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민진은 체리를 위해 그 순간
일상으로 돌아간다. 눈물이 코끝까지 오지만,
체리에게 책을 읽어준다.
20분 후
진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와
서재로 간다. 민진이도 심호흡 한 번 하고
서재문을 연다.
꺼진 PC모니터 앞,,
진수도 푹 꺼져있다.
-맞아. 힘들어.. 보통일 아니야.
내가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체리 등하원할게.
뒤돌아보지 않는 진수를 뒤에서 안아준다.
'3살 아이 키우는 거,, 보통일 아니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이럴 바에야 내가 그만둘까?'
민진은 한편으로는 이해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나한테..'
민진은 오늘따라 빨리 잠이 들고 싶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지만,
오늘이 지나면 진수는 괜찮아질 것 같으니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