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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Jan 01. 2025

그런 기억도 소중하다고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2024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입선작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 공간이 없으면 사람은 외로워지기 십상이므로 크던 작던 숨 돌리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만의 공간은 동네 서점이었다. 조용한 공간과 여유로운 음악,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안전한 곳. 그런 곳을 일주일에 한두 번 들렸다오면 친구와 수다 떨지 않아도 이내 마음이 괜찮아졌다. 내게 그 서점은 치유와 같았다. 서점은 집에서 걸으면 10분 만에 갈 수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 호수를 빙 둘러가는 길을 좋아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은 덤으로 선물처럼 다가왔다. 호수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감탄하다 넋 놓고 삼십 분쯤 내 시간을 자연에 빌려주기도 하고 흔들리는 그네벤치에 앉아 잠깐의 사색으로 에너지를 채웠다. 계절과 날씨가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도착한 서점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 장소엔 언제나 서점지기 J가 있었다.


좋아하는 서점의 임시휴무 소식을 들은 건 어느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3월.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봄의 초입. 하지만 내게는 시작보다는 끝을 준비해야 하는 겨울처럼 차가웠다. 서점가는 길은 늘 설레었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루 중 가장 밝게 웃는 날도 J를 만나는 날 이었다. 임시휴무 소식을 듣고 달려간 서점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J가 나를 반겼다.  "당분간 서점 쉬어요?"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질문부터 퍼부었다. J는 말했다. "네. 그러려고요." 담담한 어조에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일순 멍해졌다. 아무래도 독립서점들의 유효기간은 2년씩인 건지 상가의 재계약기간이 도래하면 그곳의 책들도, 가구도, 공간도 사라졌던 것이 생각났다. 자영업자들에게 그 공간을 지켜낸다는 것은 분명 매출과 상관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공간을 포기하고 조용히 떠난 이를 나 같은 단골손님 한 명이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도. 그럼에도 좋아하던 공간이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나는 후회를 했다. 내 소중한 공간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 공간을 사랑함을 더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럼 임시휴무인 한 달 동안 제가 빈 서점에 있어도 되나요? 저에게 이 공간을 빌려주세요. 저는 이 서점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삶에서 행복이 사라져요. 제가 서점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이곳의 책들도 지키고요……" 어떤 말들을 계속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J는 웃었다. "저는 상관없는데, 그럼 제 서점 좀 대신 지켜주시겠어요? 이곳 단골이시니 믿고 서점키를 맡겨보겠습니다."


바로 다음 날, J는 내게 열쇠를 복사해 주었다. 생각보다 서점을 지키는 일에 인수인계받을 것은 없었다. 서점에는 당분간 책이 배송되지 않을 거고 임시휴무 공지를 놓친 손님들이 어쩌면 서점 문 앞까지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닫혀있는 문을 열어볼 일은 없다. 서점의 전등은 내가 원하는 조도에 맞춰서 켜면 된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전구색 샹들리에 조명은 제일 아래 스위치였다. 당분간 서점 문은 닫혀있겠지만 서점 안의 전등은 켜져 있을 것이다. 매일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당분간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책들에게 내가 대신 따뜻한 눈길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책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서점엔 이제 내가 켜놓은 음악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하얀 테이블보를 두른 상에 2개의 커피잔과 잔받침을 내려놓고 이제야 J와 나는 그것을 홀짝 마셨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서로를 마주 보지도 않았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 조금, 신뢰의 미소 조금만 느껴질 뿐이었다. 조금 뒤 서점을 잘 부탁드린다고 연신 인사를 하며 우리는 멀어졌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나는 서점에 남았고, J가 서점을 떠났다.


J에게 서점이라는 공간을 선물 받았다. 이 공간에 혼자 남아있던 적은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빈 서점에서의 시간은 하염없이 느리게 흘렀다. 아무도 없으니 입술은 언제나 다물고 있었고, 입 안이 건조해질 참이면 마른기침을 하다가 물을 끓여 마셨다. 매일 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느끼고야 말았다. 혼자서 서점 안의 책들을 살펴보는 일이 할 일의 전부였다. 멈칫거리게 만드는 책이 보이면 조심히 꺼내 책의 서문을 읽곤 했다. 그러다 가끔은 씁쓸한 외로움이 느껴져 조용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등대’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읽었을 때에는 서점의 맞닿은 상황들과 비슷해 보여 마음이 같이 술렁댔다. 묵묵히 외로운 바다에서 홀로 불을 밝히던 등대지기도 이제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되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선박들은 더 이상 등대의 낭만적인 보호가 필요 없어졌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모든 것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어찌 보면 세상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낙오되고 고립되는 것들도 생겨난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래서 슬픈 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독 속에서 견디며 버티는 것이라. 그렇다면 서점은 개인의 의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서점도 언젠가는 사라질까? 나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몇 남은 등대지기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몇 남은 서점지기들은 고독하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J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서점에 있는 책들 중에는 몇 년을 두어도 팔리지 않는 책들이 존재하잖아요. 재고라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책방을 하면서 재고가 계속 쌓이면 서점 주인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요?"

"제 경험과 생각을 빗대보면요. 어쨌든 그 책은 제가 골라서 들여온 책이니까 감정이 좋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서점에 있는 동안 책들은 매일 저에게 무언의 메시지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의 가치를 나눴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책에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책에게 계속 말을 걸어줘야죠. '너희는 각자 가치를 가진 책들이고 언젠가는 그 가치가 적절한 곳에 닿는 때와 장소와 사람이 있을 거야. 가치는 변하지 않는 거니까. 너희나 나나 똑같은 운명이야. 우리의 가치를 알아봐 주길 하루하루 버티며 기다려보자'하고요."

"그렇게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으면요?"

"만약 기다려도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하면 제가 전부 가지면 되죠.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 서점이 없어지게 된다면, 이 책들은 모두 제 것이에요! 제가 언제 이 많은 책을 한꺼번에 사 보겠어요? 이런 기억은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을 기억 아닌가요?"


하염없이 그의 책들을 지키다 계절이 또 한 번 흘렀다. 결국 서점은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내가 지키던 책들은 모두 J의 것이 되었다. 나만의 공간을 잃어버린 나는 오늘도 ‘상가임대’ 종이가 붙은 빈 서점을 지켜본다. 그리움의 낙엽이 떨어질 때면 언젠가 저 안에서 흘렸던 눈물이 내 눈에서 다시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억도 소중하다고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2024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_선택한 글제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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