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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Feb 06. 2024

#05 그녀는 저들을 ‘they’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5화 <데이비드>

나는 작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사람들의 이름을 잘 알지 못했다. 00 부장님, 00 팀장님, 그나마 같은 소속 사람들의 이름은 다 외웠어도 다른 팀 사람들은 성씨와 그들의 포지션 이름을 섞은 닉네임이 전부였다.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방법에 대해 찾아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보다 더 많이 불러야 했던 것들이 있었다. 외부 업체 사람들의 이름이라던가, 클라이언트의 이름이라던가 말이다.


조금 더 큰 회사에선 아예 이름 외우기를 포기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압도적이었다. 애니메이션 속 ‘도나’처럼, 우린 일을 하러 왔으니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그나마 길을 걷다 같은 층에 내리면 같은 회사사람이려니 하고 목례를 하곤 했다. 복도를 걷다 눈을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었던 회사 생활’이었다.


캐럴은 달랐다. 그녀는 저들을 ‘they’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것, 이름을 직접 불러주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칭해 외우고선, 그들과 마주칠 일이 있을 때 하나하나 불러댔다. 어쩌고, 저쩌고, 자기 이름이 불린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워하며 그녀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다지 크게 특별한 것 없단 듯, 또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던 캐럴이었다. 아마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종말을 앞두고서 느껴진 공허함, 가족이 떠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건 회사 속 동료가 생겼고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이름을 불러댔기 때문이었다. 로이가 아닌 ‘루이스’, 기세 등등 한 흑인 여성이 아니라 ‘도나’ 로서 그들의 관계는 재정립될 수 있었다. 캐럴은 그게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랬던 그녀 앞에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자판 h를 누르며 죽음을 맞은 데이비드를 발견한 캐럴은, 그 시체를 싣고 주인을 찾아주려 한다. 그 시체가 ‘데이비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그 죽음에게라도 ‘데이비드’라고 불러줄 아내와 삼촌을 찾아갔지만, 각자의 이유로 데이비드에게 관심을 갖지 못한다. 되돌아온 캐럴은, 그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린다. 그의 삶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우리랑 함께 보내왔을 것이라며 회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던진다. 그리고선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하러 회사 옥상으로 올라간다.


도나와 루이스와 함께 <데이비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를 떠나보내주려던 순간 몇몇 동료들이 올라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데이비드와 몇 마디를 해본 적이 있어요’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추억도 모두 한 마디씩 털어내고 나서, 그의 유골함을 열어 그를 저 멀리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번 화는 끝이 난다.



그녀는 종말을 앞두었으면서 가장 종말을 대처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얼마 안 남은 시간, 가장 미련이 많이 남을 방식으로 자기 만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더 많이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만날 때 인사를 하는 것, 그리고 주말이 되면 ‘잘 들어가고 다음 주에 보자’며 인사하는 것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 같다. 새 학기에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  하는 행동들 말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여러 이야기를 ‘나만의 그릇’에 담을 준비를 할 때 하는 행동들이 아닌가.


앞으로 6개월 후, 정말 그 큰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올 때, 어찌하려고 그녀는 저렇게 자기만의 삶을 늘려나갈까. 오지랖 같은 걱정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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