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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May 24. 2023

[오늘의 생각] 이유 있는 행동.

무엇도 간과하지 말지어다.

 저는 어려서부터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12살 즈음 처음 근시안경을 썼는데,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는 습관과 컴퓨터 게임 탓인지, 매년 안경 도수를 높여야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러면서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뭔가를 집중해서 볼 때면, 고개를 어느 한쪽으로 돌린 채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비스듬한 각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이었습니다.


 나름 이유가 있는 습관이었습니다. 비스듬히 보면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유리 압축 기술이 좋아졌지만, 그때의 안경 렌즈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빛과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빛의 굴절률이 달랐습니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빛이 일반적으로 더 많이 굴절됩니다. 앞서 적었듯, 제 눈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한 번 안경을 새로 맞추면 정면의 사물이 선명하게 잘 보입니다. 그러나 눈이 조금씩 나빠집니다. 그러면 얼마 뒤, 물론 아주 미묘한 수준이지만,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 비스듬히 보는 것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시점이 옵니다. 그러면 사물을 좀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저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저에게 왜 항상 고개를 틀고 TV를 보느냐고 꾸중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엄마는 그런 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틱이나 불안 장애 따위로 생각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나의 눈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으며, 들어오는 빛의 방향에 따라 렌즈의 굴절률이 다르다는 등의 이론적 근거를 들 수 있을 만큼 해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를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 앞에서는 회초리가 무서워 시각의 선명함을 포기했고, 엄마가 눈에 띄지 않으면 습관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러다 들켜 혼난 적도 많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엄마의 그런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고개를 돌리는 습관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엄마가 저의 상황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느낀 경우는 꽤 많았습니다. 엄마는 왜 제게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 제가 실제로 겪고 있는 불편함이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고려해 주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없이 정석적인 모습만을 강요하는 엄마의 태도로 인해, 저는 엄마의 표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춤으로서 엄마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 되는 데에만 신경 쓰는 가식적인 면모를 일부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면모는 지금의 저의 다소 강박적인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글은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저는 어린 저를 꾸중하던 그때의 엄마만큼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지금 저의 모습으로부터,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을 봅니다. 엄마도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소위 워킹맘으로 만만치 않은 세상을 마주해야 했던 엄마의 모습이 이제는 가련하게 느껴집니다. 어린 엄마에게 저는, 엄마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보석이었을 것입니다. 흠집 하나 없이 애지중지 키우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몇 가지 실수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엄마보다 나은 부모, 혹은 딱 그 정도 되는 부모라도 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렇다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엄마에 대한 악감정을 갖고 있지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제 인생이 잘못되었느니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면서 상처는 아물었고, 그 자리에 엄마와의 새로운 좋은 추억이라는 새 살이 돋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엄마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저는 아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입니다. 


 아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벌써 두 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모 말을 잘 듣고, 가르쳐 주는 것을 곧잘 이해하는 아주 영특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도 합니다. 밥을 먹다가 음식 조각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동,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장난감 상자를 엎고는 손으로 휘저어 어지러뜨리는 행동, 상시 켜 두어야 하는 주방 가전 전원을 (거실 소파를 밟고 올라선 뒤 벽면 패널을 조작하여) 꺼버리는 행동 등이 있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냥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너무 피로할 때면, 장난감 상자를 본드로 바닥에 붙여 버리고 싶다거나, 음식을 골고루 주는 대신 먹이기 편한 것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행동이 제가 간과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이유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이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그냥’ 뭔가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들 역시 뭔가를 하기 전에, 그 조그만 뇌로 나름의 상황 판단을 거친 후 어떤 이득이 있을 것이라 결론을 짓고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아들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면밀한 관찰을 통해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들이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원인만 바로잡으면 해결될 아주 간단한 문제로 인해, 아들과의 관계를 망치거나, 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예화를 하나 들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예전에 장모님으로부터 들은 어떤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갓난아이를 키울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아이가 온종일 울더라 합니다. 그분은 침대도 갈아 뉘이고, 분유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 보는 등 딴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땀이 나서 불편해서 그러는 건가 하여 아이를 목욕시키려고 옷을 벗기는데, 아이의 옷 속에서 손톱 조각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옆에 눕혀 놓고 손톱을 잘랐던 기억이 나더라 합니다. 아이는 손톱이 등을 찔러 불편한데, 우는 것 말고는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 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2022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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