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전
나는 이때까지 다이어트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항상 말로만 다이어트를 외쳤을 뿐, 작심삼일은커녕 하루도 채 안돼서 포기하기 일쑤였다. 핑계를 대자면 다이어트할 때 무조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더 먹고 싶은 역효과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인 용주부가 다이어트를 결심하면서 가장 먼저 산 식재료가 뭔지 아는가? 아마 다이어트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닭가슴살이다.
닭가슴살은 특유의 퍽퍽한 식감 때문에 아무리 참고 먹어도 오래 먹기 힘들다. 시중에 나온 닭가슴살은 적당한 가공이 되어 있어서 용주부에게 기준 미달이었다. 기본 맛 닭가슴살도 있지만 그걸 매번 사 먹기에는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용주부는 닭가슴살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최대한 연구했다. 닭가슴살 요리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 할 얘기는 다행히(?) 닭가슴살이 아니라 제철 음식에 대한 얘기다.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기 직전인 11월 이맘때는 절로 군침을 자극하는 제철 음식이 많다.
전어 철에는 잔가시가 많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원래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용주부라서 별 무리 없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용주부가 U튜브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 하는데 굴보쌈이 나왔다. 하필 그 장면을 지나가다 보고 말았다. 도대체 먹방 같은 건 왜 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나인데 웬일인지 그 장면은 뇌리에 딱 꽂히고 말았다.
용주부 : 먹고 싶어?
나 : 으응? 아니야!
용주부 : 입에 침이나 닦고 말해. 근데 생굴도 잘 먹어?
나 : 요즘 생굴은 좀 그렇지?
용주부 : 그럼 굴전은 어때?
나 : (반색하며) 굴전도 할 줄 알아? 나 몰래 언제 또 해 봤어?!
용주부 : 자기 만나기 훨씬 전에 딱 한 번 해봤어. 그래서 해 줘, 말아?
나 : 뭐 해? 마트 갈 준비 안 하고?
굴전은 결혼 전에 엄마가 해준 음식이었다. 언제 적 일인지 까마득하다.
일부러 굴전을 직접 해 먹을 정도의 열의는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굴전 얘기가 나온 후부터 꼭 먹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했다. 아마 다이어트 식단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다이어트를 하면 가장 힘든 것이 첫째도 둘째도 음식이다. 하긴 음식 때문에 살이 쪘으니 힘든 게 당연하다. 그동안 무심코 먹었던 음식들을 먹지 못하니 뇌에서 어서 빨리 라면, 떡볶이, 피자, 햄버거 따위를 때려 넣으라고 날 조종했다.
보리차만 마시며 불굴의 의지로 견디길 어언 두 달, 제철 음식까지 챙겨 먹을 여유는 없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다행히 챗 지피티가 먹어도 된다고 했다. 야호!
우리는 마트에서 굴 두 봉지를 사 왔다. 한 봉지만 사려다가 굴보다 물이 더 많아 보여서 두 봉지를 샀다. 혹시나 모자라면 큰일이지 않은가!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생긴 변화 중 한 가지가 저녁을 기대하는 것인데 그날 저녁은 특히나 그랬다.
하루 식사 중 유일하게 제대로 챙겨 먹는 끼니가 저녁이다. 아침과 점심은 삶은 달걀, 방울토마토, 사과, 고구마 등을 주로 먹으니 이건 식사라고 할 수가 없다. 분한 건 이렇게 하루 중 한 끼만 제대로 차려 먹어도 견딜만하다는 것.
용주부는 요리할 때 내가 지켜보는 것을 좋아해서 항상 주방에 나오라고 날 부른다. 평소엔 귀찮아하는데 그날은 부르기도 전에 알아서 냉큼 식탁에 앉았다.
용주부 : 웬일이야? 알아서 나오고?
나 : 굴전은 갓 했을 때 먹어야 맛있거든.
용주부 : 이럴 때만 철두철미하구나?
용주부는 나의 기대 어린 눈빛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영상을 찾아본 후 본격적으로 굴전을 시작했다. 굴전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은근 번거롭다. 요리에 관심이 없는 내 기준에선 손질도 귀찮고 굴의 흐물흐물함 때문에 전으로 부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내가 용주부에게 고마운 점은 요리가 맛있는 건 나중 일이고, 요리하면서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은 점이다. 용주부가 요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누가 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게 좋지 매번 직접 하고 싶을까. 그라고 왜 하기 싫을 때가 없을까. 그런 기색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요리를 해 주는 그의 모습에서 이미 음식 맛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굴 두 봉지를 까서 흐르는 물에 씻고, 체에 거른 뒤 청양 고추도 잘게 다진다. 부침 가루도 적당히 섞어 준다. 솔직히 자세한 요리법은 안 봐서 모르겠다. 나는 그저 굴전이 식탁에 오르기만을 기다리며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요리 과정은 건너뛰고, 드디어 지직 거리며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방 가득 퍼졌다. 용주부는 굴을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떠서 한 입으로 먹기 좋게 부치기 시작했다.
넉넉하게 두른 기름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부침개 소리는 마음부터 풍성하게 한다. 닭가슴살과 삶은 계란이 주식이던 식단에 제철 굴전이라니! 가장자리가 바삭하도록 앞면과 뒷면을 골고루 익혀 접시에 담는 과정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용주부는 내가 수저까지 미리 놓고 기다리는 걸 보고 첫 판에 익은 굴전을 작은 접시에 맛보기로 내왔다. 나는 잘 먹겠다는 인사도 생략한 채 알알이 계란옷을 입은 굴 한 점을 단숨에 입에 넣었다.
나 : 으음!!!
용주부 : 맛있어? 잘 익었나?
나 : 아주 적당해! 굴 특유의 식감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느껴져.
용주부가 만든 굴전은 대성공이었다. 굴을 감싸는 계란물이 두껍지 않게 적당히 한 겹 감싸서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배가 되었다. 혹시나 느끼할까 봐 곁들인 파무침 덕에 굴전이 술렁술렁 넘어다.
왠지 자랑하고 싶어서 아는 동생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다. 굴전을 좋아하는데 잘하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며 퇴근길에 사가야겠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미안하면서 뿌듯했다.
역시 굴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직접 해 먹기가 쉽지 않은 음식인가 보다. 그 동생은 기어이 시장에서 산 굴전을 사진 찍어 보냈다. 용주부가 한 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씨알이 작았다. 내가 먹은 양의 절반도 채 안 되는 굴전의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포장해서 먹으면 바삭함도 덜하다. 부침개는 바삭함이 생명인데 안타까웠다. 갓 만들어진 굴전을 시중에서 파는 가격의 반값도 안 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오랜만에 누리는 호사였다.
그날 저녁은 굴전이 전부였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한 가지 음식 만으로 몇 첩 반상을 먹은 것보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비록 내일은 또 닭가슴살로 돌아가겠지만, 이렇게 제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