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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Mar 12. 2024

인간이라는 짐승

 인간이라는 짐승 


 이 짐승에게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면? 눈깔이라도 뽑아 갈 거요. 보스, 거리를 좀 둬요! 놈들이 기어오르게 하지 마요. 우리는 평등해. 우리는 똑같은 권리가 있어. 이따위 소리는 하지 마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빵을 훔치고 당신 권리도 빼앗고 굶어 죽게 한다니까요. 보스, 좋은 걸 다 걸고 충고합니다. 제발 거리를 둬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광산 개발을 하면서 일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주인공 나에게 조르바가 호통을 친다.     


 ‘이 짐승에게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 거요. 보스, 거리를 좀 둬요!’     


 우리는 이 ‘거리 두기’가 힘들다. 언뜻 생각하면, 이 힘듦이 사랑의 마음 같은데, 그렇지 않다.     


 우리가 ‘착한 사람’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도덕 교육을 받아왔다.       


 ‘인사 잘해라. 어른 말씀 잘 들어라... .’ 착한 아이가 되었을 때마다 칭찬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나쁜 아이가 되면, 무서운 처벌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차츰 ‘사탕과 채찍’에 길들어져 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착한 아이의 행동을 하게 된다. ‘정말 이 행동이 착한 걸까?’ 이런 고민은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아는 타고난 마음이 있다. 우리는 이 마음, 본성(本性)을 깨워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이 마음을 깨우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마음공부가 미흡한 보스는 광산 일꾼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그러면 일꾼들은 용케도 알아본다.     


 자신이 선한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은 정신이 얼마나 허약한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먹잇감이 된다.     


 ‘착하게 살아가면, 사는 게 힘들어!’ 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어 간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둘 뿐인 세상은 늘 아비규환이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하나의 싱싱한 생명체다. 생명의 의지로 살아가야 한다. 생명의 의지가 벌이는 잔치, 이 세상의 실상이다.      

 조르바는 생명의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행한다. 모든 존재에게서 신비를 느낀다.     


 그에게는 이 세상 자체가 기적이다. 이런 일상의 신비를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사는 게 지루하다.     


 뭔가 신기한 것을 찾아 나선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나?’ 그는 늘 목마르다.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다고 했어.’     


 그렇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 하지만 조르바에게는 모든 게 사막이면서 동시에 오아시스다.     


 그는 죽기 전에 중얼거린다.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데... .’ 그는 언제나 아이 같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 콜픔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세상을 맑디맑게 비추는 큰 거울 같은 마음을.     


 우리는 그 거울을 들여다보기만 하만 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훤히 보인다.     


 이 세상은 온갖 존재들이 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각자의 왕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간다.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은 남에게 기대려 한다. 남에게 기대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문득 

 저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것이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     


 - 이안, <메꽃> 부분               



 시인은 메꽃을 본다. 무심히. 그는 알 수 없는 무한한 심연을 본다.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


 ‘이 세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세계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아슬하게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비로소 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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