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후에게는 애착이불이 있는데 알레르기 방지용으로 나온 이불로 가벼우면서 덮으면 바스락 소리가 난다. 준후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휘감으면서 들리는 그 사각거림이 좋은지 집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그 이불만 찾고 온종일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뒹구는 통에 하루는 그걸 숨겨놨다.
“이부! 이부울!”
애타게 이불을 울부짖었지만 나는 잠잘 때 줄 수 있다고 말했고 내 말을 이해 못 한 준후는 계속 이불을 찾았다. 남편이 퇴근하고 나서도 이불 타령은 멈추지 않았고 보다 못한 남편이 말했다.
“그럼 우리 일찍 잘까?”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뭘 자냐는 나의 잔소리를 등진 채 두 남자는 장롱에서 준후 손이 닿지 않게 높이 놔둔 이불을 꺼냈다.
남편이 이불을 건네자 마치 진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준후는 “우와!” 감탄을 하더니 얼굴을 이불에 푹 파묻으며 부비적댔다. 그러고는 내가 뺏을까 봐 이불을 꽉 붙잡고는 쏜살같이 침대로 달려갔다. 저게 저리 좋을까 싶어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저기 봐.”
남편이 준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는 준후 뒤에 뭐 묻었나 싶어 쳐다봤는데 그냥 이불 업고 튀는 맹랑한 아들의 뒤태뿐이었다. 내가 뭘 보란 거냐며 눈짓으로 말하니 남편은 여전히 준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준후 뒤통수가 행복해 보여. 이불 하나에 저렇게 행복해하다니. 행복한 뒤통수 같지 않아?”
“행복한 뒤통수?”
그러고 보니 준후의 뒷모습만 봐도 쟤가 지금 얼마나 들뜨고 설레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앞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됐다. 눈은 갈고리처럼 휘어져있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헤벌쭉 벌린 입에는 빠진 앞니 구멍으로 공기가 숭숭 들어오고 있겠지. 뭘 해도 감흥이 없던 아이가 고작 이불 하나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남편의 그 단어는 종의 울림처럼 오래도록 내 머리에 파문을 만들었다. 치료 정체기인 시기였다. 아무리 새로운 치료센터, 영양제 등을 투입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자폐 증상이 점점 짙어졌고 나는 걱정과 좌절로 몸부릴 칠 때였다. 행복은 아이가 자폐가 아닐 때만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 기준이 다르면 우린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행복은 아이의 이불처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고소한 나물 반찬에서, 잔잔한 솜털이 박힌 아이의 볼에서, 창 밖의 눈부시도록 투명한 하늘에서 찾을 수 있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그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나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브런치 스토리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렸고 뒤통수마저 행복한 아이처럼 되라는 의미로 남편이 툭 던진 그 말을 소설 제목으로 정했다. ‘행복한 뒤통수’
난 쓰다 만 글들이 너무 많았다. 언제나 중간쯤 쓰다가 멈췄고 어떤 건 제목만 덜렁 있는 것도 있다. 그런 내가 아이를 소재로 글을, 그것도 연재소설을 쓸 수 있을까, 과연 완결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압박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자식 이야기인데 미완으로 남긴다면 나 자신이 한심할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큰 모욕이 될 것 같았다.
연재는 예전에 끝났지만 감히 완결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고치고 또 수정하며 이제 겨우 떨리는 손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나의 이 부족한 글을 읽고 라이킷을 눌러주고 응원해 주신 아량 넓은 브런치 작가님들과 독자님들 덕분에 이 연재를 잘 마감할 수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낯부끄럽고 드러내 보이기 민망하지만 ‘책이라는 자식을 낳는다’는 강원국 작가님의 말처럼 나도 조심스레 내 자식 이야기가 들어있는 자식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모르는 단어가 있어 사전을 검색하다 문득 ‘복지’란 단어를 찾아봤다.
· 복지(福祉): 행복한 삶
사회 복지, 근로자 복지, 아동 복지, 장애인 복지 등 복지란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이게 어떤 뜻인지도 모르고 썼는데 뜻풀이를 보니 왠지 맥이 탁 풀렸다. 거창하고 대단한 뭔가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단순 명료하게 설명된 걸 보면 내 인생도, 우리 가족의 미래도, 준후의 행복도 어쩌면 단순 명료한 게 아닐까. 행복하자! 란 말을 하면 행복이 뿅! 하고 나타나진 않지만 적어도 ‘행복한 뒤통수’를 쓰는 순간순간들은 행복했다.
불행한 경험도 나중에 떠오르면 행복한 일이었다고 회상하듯이 내 모든 일상이, 준후의 시간들이 행복이란 물감으로 칠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