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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언 Dec 26. 2022

코로나 그리고 예정없던 이별

어쩌다 호치민 마담 #13

남편 회사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베트남 친구들은 항상 물어봤다.  

- "그럼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  

처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땐 참 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 만남이 기한이 정해져 있는 만남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 그리고 남아있을 사람들. 떠나는 사람만큼이나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스란히 이별의 감정을 떠안아야 하니까. 그래서인지 자식들이 한국 아이들과 친해지면 그 부모들은 언제 돌아가는지부터 물어보는 것 같다. 베트남에서 남편이 개인사업을 시작해 한동안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들은 반색했다.  

- "우리 아이들이 오랫동안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kevingent, 출처 Unsplash


하지만 세상 일이 늘 뜻대로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코로나(covid-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는 불황에 시달렸다. 남편이 시작한 사업도 불안한 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멀리는 10년까지 계획을 세웠지만, 코로나가 다 망쳐버렸다. 코로나는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예정되었던 미팅도 취소되기 일쑤였다. 의료시설 기반이 약한 베트남의 코로나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는 모든 걸 멈추게 만들었다. 도로는 차단되고, 거리엔 사람도 오토바이도 보기 힘들어졌다. 흐름을 멈추면, 코로나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베트남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 yohannlibot, 출처 Unsplash


두 아이의 국제학교 학비 청구서가 날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국제학교는 호치민에서 학비 비싸기로 1-2위를 다투는 학교였는데, 두 아이의 1년 학비가 거의 1억 원에 달하였다. 남편이 주재원일 때는 회사의 지원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온전히 그 비용을 감당해야만 했다. 첫 해는 가지고 있던 돈과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어찌어찌 해결했다. 우리가 베트남에 계속 머물려고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들의 교육환경 때문이었으니까. 적어도 선행학습이나 사교육,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족했다. 1년 후엔 코로나도 나아지겠지....


하지만 코로나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곧 다음 학비를 걱정해야만 했다. 코로나로 멈춘 세상 덕분에 우리는 아이들 학교를 옮길지를 고민했다. 그래도 베트남을 영영 떠나는 건 아니니까. 학교를 옮길 때도 베트남 친구들에게 더 오래 베트남에 머물기 위해 학교를 옮긴다고 이야기했다. 베트남 친구 중 하나가 베트남 사람 중에도 코로나 때문에 학비를 못 내서 버티는 아이들도 꽤 있다며 학교장에게 편지를 써보는 걸 제안했다. 자기 친구도 코로나 때문에 힘들다고 학비 사정을 봐달라고 학교장에게 편지를 썼더니, 학비를 할인(?)해주었다고 했다. 가능한 이야기다. 베트남에 있는 국제학교는 베트남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곳은 비싼 학비를 부담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거나, 고위직이거나, 유명인의 자재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코로나 때문에 사정이 안 좋더라도, 여전히 베트남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한국에서 온 사업하는 사람들일 뿐,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있을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학교장에게 방학 전 코로나로 인한 우리의 경제 사정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읍소하는 이메일을 썼다. 쪽팔림을 무릅쓰고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학 내내 학교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회신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우선 1학기 학비는 준비를 해두었다. 개학 후 학비 납부 마감을 앞두고 기다리던 답신이 왔다. 학교장은 1학기 학비를 분할해서 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대했던 학비 할인은 아니었지만, 당장에 급한 불은 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고맙다고 회신했다.  일단 1학기 학비를 분할해서 내고, 한국계 국제학교로 전학 갈 준비를 시작했다.


출처: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KIS)는 학비도 저렴했고, 한국어로 수업하는 학교라 경쟁률이 높았다. 경쟁률이 높아서일까, 한국국제학교 초등학교는 티오가 생길 때마다 대기 학생을 받는 게 아니라, 일 년에 3번 정기적으로 티오를 합산에 추첨으로 아이들을 선발했다.  학년이 높을수록 티오가 잘 나지 않는 데다가, 중등으로 가면 필기시험에 면접까지 본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전적으로 운에 맡겨야 하기 때문에, 일단 티오가 나는 대로 지원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1학년은 미달이라 서류 접수한 전원 합격했다. 문제는 3학년인 첫째였다. 대학입시도 아닌, 초등학교 전학 추첨 경쟁률이 자그마치 6대 1이었다. 남편도 나도 뽑기엔 영 재능이 없어 불안했지만, 일단 한국국제학교에서 사무실이 가까운 남편이 가서 공을 뽑기로 했다. 강당에 모여, 접수번호가 호명되면 하얀 공과 오렌지 공이 들었는 불투명한 상자에서 공을 뽑는 방식이다. 고작 공 색깔이 당락을 결정한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뽑는다고 했다. 남편은 역시나 오렌지 공을 뽑았다. 다음 추첨까지 똥손이라고 놀리고 싶었지만, 우리에겐 현실적인 문제였기에 딱 두 번만 놀렸다.


그리고 몇 달 후 두 번째 공 뽑기의 날이 되었다. 지난번엔 남편이 뽑았으니, 이번엔 내가 가기로 했다. 이번 경쟁률은 10대 1, 역시 나도 오렌지 공을 뽑았다. 우연히도 그날 흰 공을 뽑은 사람은 모두 흰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었는지 탈락한 사람들이 강당을 나서며 "나도 흰색 옷 입고 올 걸 그랬네" 했다. 흰색 옷에라도 매달려보고 싶었겠지. 나도 그날따라 옷장에 흰색 옷이 자꾸 눈에 밟혔는데 입고 올 걸 그랬나 싶다가도, 흰색 옷 입고도 나만 꽝이면 더 짜증 났겠다 싶었다. 꽝은 그냥 꽝이다.


첫째는 결국 또 다른 한국계 S국제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4명을 뽑는데 6명이 지원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고, 영어 인터뷰까지 했다. 첫째는 자기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며 수학이 어려웠다고 했지만, 영국국제학교에서 놀기만 했던 건 아니었는지 최종 합격했다. 두 한국계 국제학교의 차이는 호치민 한국국제학교는 한국 교과과정에 따라 한국어로 수업하고, 한국인 담임선생님에 영어와 베트남어 수업이 별도로 있다. 반면 S국제학교는 미국 커리큘럼에 따라 영어로 수업하고, 외국인 담임과 한국어, 베트남어, 성경수업이 있었다.  


전학 가는 아이들에게 반친구들이 남긴 메시지들


먼저 접수 인원 미달 덕에 바로 합격한 둘째는 예정에 없던 빠른 이별을 겪어야만 했다. 수요일 오후에 합격 발표가 되고,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로 등교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미달이었지만, 다음번에도 미달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등록만 하고 학교를 오지 않으면 합격이 취소될 뿐 아니라, 영구히 접수 기회가 없다는 규정도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했더니, 기억에 남는 마지막 날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다. 반 아이들이 둘째 아이 몰래 메시지를 썼는지, 아이들에게 메시지 보드를 받고 들고는 울먹였다. 왜 자기만 학교를 옮기냐고, 친구들을  헤어지기 싫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을 떠나는 건 아니니 연락해서 같이 놀면 된다고, 네가 운이 좋아서 뽑혀서 학교를 옮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학교를 옮기고도 반친구들의 부모님과 연락하며 영국학교를 다닐 때보다 더 자주 친구들과 만나고, 서로의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그 덕분인지 둘째는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동안에도 예전 친구들을 만나며 즐거워했다.     


첫째는 그나마 시간이 있었다. 2월 초 합격 결과가 발표되었고, 3월부터 새로운 학교를 가면 되었다. 2월 중순까지는 텀브레이크여서 학교를 쉬었지만, 2월 마지막 한주는 친구들과 보낼 시간이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연락드렸더니, 잊지 못할 일주일을 보낼 수 있도록 하자고 하셨다. 외국인이라 쿨 한 건지, 다들 작별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 주를 남기고, 학교는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째는 새로운 학교를 가기 전 제일 친했던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아이랑 친했던 절친 3인방은 우리 아이들 둘러싸고 꼭 안아줬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헤어질 때는 또 꼭 안아줬다. 그렇게 첫째는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둘째와 마찬가지로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아이들의 학교를 옮기고 학비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 아이들도 조금씩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면서 안정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결국 우리는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망할 코로나는 우리에게 예정에 없던 베트남과 이별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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