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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언 Mar 14. 2024

이 와중에 미국여행?!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려 했었다

출발까지는 6개월이나 남아 있었고, 출발 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낙관했다. 출발 3달 전까지는 위약금 없이도 항공편을 취소할 수 있었고, 그 후라도 약간의 위약금을 내더라도 취소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로 당분간 미국여행에 관한 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내 의지라고는 1도 반영되지 않은 여행이었다. 아들이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미국항공티켓을 덜컥 사버리는 건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마일리지가 대량으로 사라진다는 위기감과 아들의 동기부여가 만들어낸  뜻밖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여행준비는 고스란히 내가 다하게 생겼다. 내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미국여행인데, 왜 내가 준비해야 하지? 베트남에선 적당히 먹히던 내 영어가 미국에서도 통할까? 한국에서도 아이 걱정에 노심초사인데 넓디넓은 미국 땅에서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한 번의 LA 직장연수와 하와이 신혼여행이 미국에 대한 전부였던 나는 미국여행에는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geojango_maps, 출처 Unsplash

나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국여행에 앞서 이런저런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다. 우선 남편의 서울 본사 발령. 


남편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최소 5년은 포항에서 지낼 거라고 했었다. 시 시작하는 한국생활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이 아닌 포항이라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베트남에서 적당히 느린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포항은 한국생활 적응을 위한 적당한 완충지대가 되어줄 것 같았다. 제로 우리 가족은 포항에서 우리 만의 슬로 라이프를 누리며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서울 발령이라니. 물론 자회사에서 본사로 발령받는 것은 쉽게 오지 않는 기회로 남편이 지난 2년 동안 성실히 일한 결과로,  분명 좋은 기회이고, 기뻐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즐겁지가 않았다. 포항 생활에 나름 만족하며 편해지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하지만 본사발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서울 발령은 미국 여행을 취소할 빌미는커녕, 이사준비라는 새로운 미션을 추가해 주었다.


두 번째 사건, 둘째 성조숙증 판정. 또래보다 살집이 있어서 불안했던 나는 성조숙증은 만 10세 전에 확진을 받고 치료까지 시작해야 의료보험이 적용된다는 소리에 성장클리닉으로 향했다.  뼈 나이는 또래보다 많이 앞지르진 않았지만, 호르몬수치가 높아서 주사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호르몬 치료를 받을지는 어른의 선택. 혹시나 하고 검사받았다가 확진을 받고 나니 말 그대로 멘붕이 왔다. 괜히 검사를 받았나.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취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챙겨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서울로 가면 병원도 바꿔야 는데....


어쨌든 학교 전학 시점을 고려해 이사 날짜도 잡아야 했다. 이사부 터하고 여행을 갈 것인지, 여행을 다녀와서 전학, 이사를 할 것인 지부터가 고민스러웠다. 장장 6주에 걸친 여행이었고, 성수기를 피하기 위해 방학 2주 전인 7월 초로 예약을 했기 때문에 현장학습을 2주 동안 신청해야 했다. 전학 가자마자 2주를 빠지기엔 부담스럽긴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2학기 시작할 무렵에 이사를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시나리오로 보였다.


하지만 전학 예정 학교에 문의해 보니 알고 보니 겨울방학 동안 석면공사기간 확보를 위해 여름방학을 1주만 하고 계속 수업진도를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학습공백을 최소화하려고 여름방학 때 다녀오기로 한 건데, 결국 1달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전학 예정인 학교는 방학이 아니라 학기 중이기 때문에  현장학습을 신청할 경우 4~5주나 내야 했다.  학교마다 현장학습신청 가능기간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최대 1달까지였기 때문에 결국 처음 생각했던 대로 여행을 다녀와서 전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1달의 학습 공백이 생긴 건  안타깝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미국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서울로 이사를 해야 한다. 졸업까지 하고 가면 좋겠지만, 두 집 살림을 하는 동안  생활비, 공과금, 관리비와 은행대출이자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여행경비도 적지 않게들 텐데. 항공편만 있을 뿐 아직 숙소예약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서울로 이사하기로 했다. 어차피 전학 가야 한다면 첫째가 중학교 배정받기 전에 가야 했다.


머릿속이 복닥복닥 복잡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일이 많을 땐 하나씩 하나씩 꼬인 실타래를 찾아서 풀어야 하는데, 가위로 확 잘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실이 복잡하니 오히려 여행준비로 마음이 향했다. 현실도피. 비록 다녀와서 난리가 나더라도 일단 뭐라도 해보자.  와중에 그래도 즐길 수 있는 건 여행 준비 같았다. 대한 방임을 했으니 여행도 이사도 하나씩 차분히 체크리스트 만들어서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국 이렇게 될 것을 괜히 방임했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떡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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