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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Jan 10. 2022

지극히 개인적인 인사평가

영화 속 컨시어지들을 위한 얼쑤의 합격 목걸이.

세상은 요지경이고, 호텔은 인간 군상이라는 말을 업계 사람들끼리 자주 한다.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장소인 만큼 그들로부터 파생되는 수만 가지의 드라마가 존재한다. 컨시어지를 비롯한 호텔리어들은 그 드라마에 잠시 등장하기도 했다가 한 발 떨어져 호텔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지켜본다. 이런 드라마들이 무료 상영되는 호텔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소로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다목적 성격을 띤 매력적인 장소다.


영화나 드라마 속, 호텔이란 장소에서는 보통 중요한 비즈니스를 은밀하게 논의한다거나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알리는 결혼식을 하거나 바람을 피거나 바람피우는 그 현장을 포착하는 곳으로 쓰인다. 때론 주인공이 호텔을 소유하거나 주인공의 부모 중 한 사람이 호텔 회장님이기도 하다. 가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주로 호텔과 호텔리어에 대한 환상만 심어주는 픽션이 대부분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들 수 있겠다. <호텔 델루나>의 마지막화 엔딩 장면에 새로운 호텔 객잔인 '호텔 블루문'의 사장님으로 김수현이 등장하는데, 그날 나의 인스타그램에는 김수현이 등장하는 장면과 함께 호텔 매니저가 김수현이라면 평생 내 무릎을 갈면서 일할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었다. 이 기록의 결론은 하나다. 현실 호텔에는 아이유, 여진구, 김수현 같은 직장 동료가 없다는 것.


<호텔 델루나> 이후로 호텔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없었다. 대신 극 중간에 호텔이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호텔리어들의 이야기는 영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극의 흐름을 위해 호텔리어가 보조 역할을 맡는 경우가 있는데, 이 호텔리어가 컨시어지일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어쩌다 컨시어지가 외국 영화에 등장하더라도 ‘Concierge’는 국내에서는 늘 호텔 수위 또는 경비원으로 번역된다. 고유한 의미가 있는 유일한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내에서 그 개념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여전히 이런 안타까운 번역들이 참 많다.


그래서 한번 써보기로 했다. 영화 속에 숨어있는 ‘컨시어지’ 들을 찾아 이들이 컨시어지로서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 지극히 내 기준과 사심을 담은 냉정한 평가를 해보는 글을 말이다. 배우들이 연기한 컨시어지를 토대로 다시 한번 컨시어지에 대한 소개도 할 겸 영화 속 컨시어지는 과연 픽션과 논픽션 그 사이 어디쯤을 표현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 속 많은 장면들 중에서 컨시어지의 일을 현실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유효한 장면들을 뽑았으며 전개되는 스토리와는 별개로 순수하게 그 장면만을 기준으로 극 중 컨시어지를 매의 눈으로 평가할 예정이니, 이는 꼭 참고해주길 바란다. 그 장면이 등장하는 시간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주자는 대한민국의 연말을 책임지는 겨울 영화의 바이블 <나 홀로 집에 2 - 뉴욕을 헤매다>에서 배우 팀 커리가 연기한 컨시어지인 미스터 헥터다. 수백번을 본 이 영화에 컨시어지가 등장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꽤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다.



28:17
Yes, two at 8:00, Henri. Mr. Yamamoto.
네, 8시에 두 분입니다. 예약자명은 야마모토 씨입니다.


어딘가에 예약하는 중인 헥터다. 그는 과연 무슨 예약을 하고 있는 걸까? 일반적으로 예약이라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레스토랑 예약만을 떠올리는데, 컨시어지가 게스트의 여행을 짓기 위해 하는 예약의 종류는 꽤 다양한 편에 속하며 예약 전화만 하루에 수십 통을 한다. 레스토랑 예약은 물론이요, 투어, 공연, 온갖 병원, 점집, 마사지, 차량, 호텔, 의류 브랜드, 미용실, 시가 바, 백화점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게스트 이름, 인원 수, 시간만 알려줘서는 할 수 없는 예약도 많다. 시험관 아기 시술 상담 예약, 미래가 궁금한 게스트를 위한 용하다는 점집 예약, 한국에 첫 출시된다는 모 브랜드의 성인용품 구매 예약 등 태어나서 내가 아직 해보지도 않은, 해볼 일 없는 다양한 종류의 예약 전화를 한다. 예, 컨시어지는 해냅니다.


40:44
Excuse me. How do I get to Columbus Circle?
실례합니다만 콜럼버스 서클까지 어떻게 가나요?

The doorman will be happy to find you a taxi.
도어맨이 택시를 곧 잡아드릴 겁니다.


콜럼버스 서클에 가는 법을 묻는 게스트를 응대 중이지만 곧장 도어맨이 택시를 잡아줄 것이라는 답을 건네며, 잠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헥터는 냅따 케빈에게 향한다. 헥터, 정말 꽝입니다, 꽝! 게스트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건 컨시어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업무지만 의외로 굉장한 꼼꼼함을 요한다. 이 낯설고 광활한 도시에서 게스트가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것은 컨시어지에겐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컨시어지가 24시간 내내 붙어있을 수 없기에 호텔 밖에서는 컨시어지의 길잡이 역할을 택시 카드가 대신한다. 명함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의 종이로 만든 택시 카드에는 게스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정확한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가 오밀조밀하게 적힌다. 이때 중요한 건 이 택시 카드를 가장 자주 보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을 위해 흘려 쓰지 말고 꼭 또박또박 큰 글씨로 적는 것이다. 네임펜으로 쓰는 게 가장 좋다. 간혹 어떤 업장들은 며칠 사이로 이전 또는 폐업을 했을 수도 있기에 주소의 유효성을 꼭 확인해야 게스트가 헛걸음하고 돌아와 컴플레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택시 카드와 돌아올 때 쓰일 호텔 주소가 적힌 카드를 함께 챙겨준 이후에 헥터가 차량 안내를 해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40:49
Mr. McCallister!  And how are we this morning?
맥칼리스터 씨! (중략) 잘 쉬셨나요?

Fine. Is my transportation here?
네. 제 차량은 도착했나요?

Out in front sir. A limousine and a pizza. Compliments of Plaza Hotel.
차량과 피자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플라자 호텔에서 무료로 준비했습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케빈을 즉각적으로 알아본 헥터는 “Mr. McCallister!” 라며 케빈을 부른다. 아침 인사를 나누며 미리 준비해둔 케빈의 차량과 피자에 대해서 술술 설명하는 것을 통해 게스트들의 일정을 사전에 잘 숙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케빈이 데스크에 다가오기도 전에 헥터는 그의 등장을 감지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다. 게스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름을 다시 불러준다는 건 호텔의 서비스 수준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척도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럭셔리 호텔들의 기본이자 상징인데, 국내의 많은 럭셔리 호텔에서 놓치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소프트웨어다. 호텔 오픈을 준비할 때, 읽기 어려운 각 국가의 대표적인 성을 따로 발음하는 것을 개별적으로 연습하며, 혹시라도 게스트의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때, 어떤 멘트를 하여 발음하는 방법을 확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을 정도로 호텔에서 게스트의 이름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게스트의 존재를 늘 인지하고 있으니 언제든 내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신호로 게스트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작점이다. 컨시어지는 하루에 수십 명의 게스트를 마주치고 응대한다. 그리고 내가 만난 게스트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게스트가 동반한 사람들까지 기억해야 한다. 요즘 국내 럭셔리 호텔의 하드웨어가 아무리 최신이고 최고여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내 이름 하나 불러주는 직원이 하나 없는데 말이다.


41:51
Bye.
안녕히 계세요.

Have a lovely day.
좋은 하루 보내세요.


헥터, 인사는 잘했지만 에스코트가 빠졌잖아요! 럭셔리 호텔에서 에스코트는 눈여겨 볼만한 또 다른 소프트웨어다. 컨시어지의 에스코트는 주로 내가 응대하던 게스트가 데스크에서 용무를 마치고 호텔을 나서고자 할 때 시작되며, 보통 데스크에서부터 차량 혹은 게스트가 나가는 정문 또는 후문까지 이뤄진다. 만약 게스트가 차를 탈 경우에는 게스트를 태운 차량이 출발하여 시야에서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 이외에도 찾아볼 수 있는 럭셔리 호텔의 대표적인 에스코트로는 체크인 후의 엘리베이터 에스코트, VIP 게스트에 한한 룸 에스코트가 있다. 호텔이 바쁜 성수기일 때는 에스코트의 방법이 간소화되기도 한다.


총평: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까지 고려한다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컨시어지인 헥터에게 2.5점을 주고 싶지만 앞서 선정한 영화 속 4개의 씬만으로 본다면 헥터에 대한 나의 최종 점수는 4점이다. 럭셔리 호텔의 컨시어지로서 가져야 할 역량은 어느 정도 가졌을지 몰라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바보 같은 행동으로 헥터는 늘 게스트 앞에서 삐걱거린다. 게스트를 섬세하게 다루는 퍼스널 터치가 부족하며 본인이 제공하는 컨시어지의 소프트웨어를 끝까지 끌고 가 마무리 짓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헥터, 안타깝지만 당신은 우리 팀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암 쏘 쏘리...


다음 영화  컨시어지는 과연 합격 목걸이를 받을 수 있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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