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의 따뜻한 햇살테라피 만큼이나 내 영혼을 위로해 주던 인생책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책마다 얽힌 내 과거를 떠올리며 더 깊은 상념에 젖어들던 중, 태국 코사무이행 페리 스티커가 붙은 유난히 꼬깃꼬깃해진 책 하나에 분주하던 시선이 머물렀다. 내게 여전히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묵직한 여운을 남겨놓은 책, 남국의 따뜻한 햇살 테라피 만큼이나 내 영혼을 위로해 주던 책, 고스란히 한 사람의 지난 시간을 안고 있는 책이 있다.
태국과 라오스를 발길 닿는 대로 방랑하던 내 옛 시절을 간직한 이 책 안에는 실패한 연애의 좌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 남들의 시선에 휘둘리던 나약한 가치관의 혼란까지 휘갈겨 쓴 일기처럼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킁킁, 그리고 이건 분명 짭조름한 태국 바다 냄새다. 그 비릿한 향취에 시고 달고 맵고 짠 똠양꿍의 알싸한 향신료와 절대 빠질 수 없는 맥주 창(Chang)의 거품까지 모조리 코코넛 태닝 오일로 반쯤 투명해진 종이와 함께 뭉개져 있다.
- [오래된 집의 탐미](2025, 김서윤)에서 발췌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을, 조금은 색다른 곳에서 맞이해 보고 싶다는 오랜 로망을 품고 떠난 태국과 라오스였다. 깊은 절망에 징징대면서도 기어코 삶을 지탱해 온 스스로에게 주는, 호기롭고도 이색적인 선물이었다. 비행기에서 읽으려 챙겨둔 책을 그만 캐리어에 넣고 부쳐버리는 바람에, 공항 서점에서 급히 집어든 책 한 권. 사면서도, 이 물리적인 두께와 담고 있을 심오함에 과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도 싶었다.
책을 펴고, 체념한 듯 읽어 내려가기 전까지는
... 분명, 그랬다.
하지만 이내, 뭔가 알 듯 모를 듯 그런 애매한 감정 실린 언어의 중의적인 모호함 속에 빠져들었다. 내 해석되지 않았던 엉킨 삶의 마음이, 저 책 안에 그대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여행 내내 나의 고민을 함께 하며 동남아의 나른한 여백을 서늘하게 채워주었다.
네 사람은 각자 자신이 머물고 있던 세계에서 갈망하던 세계로 혹은 원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레 또 다른 세계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의사 토마시에게는 테레사를 향한 연민, 안쓰러움, 동정이 사랑의 시작이 되었다. 테레자가 토마시의 시적 영역, 즉 시에서나 있을 법한 순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토마시는 <그래야만 한다!>를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렇다.
취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자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영혼을 꿈꾸는 테레자의 사랑]
시골 레스토랑의 종업원이었던 테레자는 현재를 떠나 영혼이 있는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테레자는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프라하로 향한다. 그렇게 테레사는 자신의 영혼을 불러내 준 토마스를 사랑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그녀는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았고
그것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울음을 참기 위해 그녀는 수다스러웠고
큰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사비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치사회적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갈망하는 화가이자, 토마시와 프란츠의 연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매우 키치적인 세계에 있던 사비나는 토마시의 키치적이지 않은 솔직함을 좋아했다. 그녀는 육체 이외의 영혼이 끼어드는 사랑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아내와 헤어지고 그녀를 선택한 연인 프란츠를 배신하고 떠난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사비나를 사랑하게 된 프란츠는 스위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생에 불편할 게 없는 교수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하면서 안전의 세계에서 혁명의 세계로 나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같은 단어를 놓고도 서로 대화가 안 되는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 사비나에게 버림받는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사비나의 육체적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
그의 자유의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 이 희열,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연민으로 가득한 토마시의 사랑, 영혼을 꿈꾸는 테레자의 사랑, 자유로운 영혼 사비나의 사랑, 삶의 드라마를 꿈꾼 프란츠의 사랑.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네 사람의 사랑 방식과 선택들은 당시 내가 지녔던 부분 부분의 심상을 투영한다.
때때로 나는 테레자처럼 영혼이 깃든 진정한 사랑을 원했고, 사비나처럼 누군가의 진심 따위는 무시하며 태연한 척 스스로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토마시의 나쁜 면만을 빼다 박은 못난 남자에게 반해 이용만 당하고 마는 비참한 외사랑으로 쭈글쭈글 시들어갔다. 프란츠의 안정과 헌신을 추구하는 지나치게 진지한 사랑에는 심드렁, 호르몬조차 반응하지 않았기에 위험하고 격렬한 감정만 좇았던 때도 있었다.
나의 삶은 아직 진행형이므로 또 누군가를 만나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게 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 네 사람의 사랑보다는 그리고 내 지난 사랑보다는 더 많이 평온하고 성숙하기를 바란다.
- [오래된 집의 탐미](2025, 김서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