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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Jun 30. 2024

렘브란트 반 레인,내면의 깊은 성찰이 담긴 바로크의 빛




독창적인 예술가가 새롭게 나타날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무한대로 증가하며,

수 세기 전에 없어진 하나의 행성에서부터 

발산한 빛이 현재의 지구까지 도달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렘브란트, 혹은 페르메이르라는 이름의 행성에서

나온 빛은 그 근원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들을 감싸고 있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네덜란드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며, 레이크스 뮤지엄의 대표작 [야경 Night Watch] 전시실에 다다르면 저 거대한 작품의 깊은 곳에서부터 분출해 나오는 빛의 힘에 감당할 수 없는 이끌림을 받게 된다. 점점 다가갈수록 빛은 철저한 고독감으로 나의 신체감각과 감정을 자극한다. [야경] 앞에 서서 작품과 나만의 일대일, 은밀하고 농밀한 대화를 이어간다.



나만의 빛을 찾았는가?


지금 나는 어딘가에 존재할 나만의 빛을 찾아 먼 길을 떠나왔다. 미술관 안, 렘브란트의 이 작품만을 위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시각적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저 바로크의 깊은 심연의 빛 앞에서 짐짓 철학적 질문을 던져본다. 어느 날 발견한 내 기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내 처량한 빛이 타인에 대한 의식 없이 오롯이 뿜어져 나올 고유한 나만의 빛을 찾았는가... 하고.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Rembrant Harmenszoon van Rijn (네덜란드, 1606-1669)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바로크풍 화가로 네덜란드 전성기와 쇠퇴기의 운명을 함께 했다. 약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으며 이는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후배 화가 반고흐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는... 자연 그 이상, 게시입니다." - 빈센트 반 고흐







야경 the Nightwatch

1642년, 캔버스에 오일, 363cm X 437cm



이 작품은 1637년 프랑스 루이 13세의 모친인 마리 드 메디치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하던 날, 프란스 반닝 코크가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시민군(화승총연대)의 모습을 그린 단체초상화이다. 화승총연대 신관(현재 Doelen Hotel)의 가장 큰 홀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는데, 1715년 그림이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사이즈가 맞지 않아 작품의 일부를 잘라냈다. 레이크스 뮤지엄의 [야경] 옆에 잘리기 전 복제품이 나란히 전시가 되어 있다. (아쉽게도 잘린 부분은 소실되었다.) 


대원들이 마치 어디론가 막 출발하려는 분주하고도 들뜬 순간의 찰나를 표현한 듯한 이 작품에는 단체초상화가 가지는 식상과 경직성이 없다. 마치 뭔가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을 대원들 하나하나의 살아 있는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역동감을 자아내는 구도로 심어놓았다. 


당시 작품값은 그림 속 주인공들이 100 길더씩 분담하여 지불했다. 이는 대원들의 1/n 더치페이 형태의 비용 지불과 그에 합당한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평등한 화면 구성이 당연시되던 단체초상화에서 렘브란트가 가지는 혁신성이다. 주조연이 극명하게 드러나 버린 인물의 배치 속에 대원들의 더치페이는 쉽지 않았을 듯싶다. 실제 렘브란트는 이 작업으로 더 이상 단체초상화 주문을 받지 못했다.




바로크의 운동감과 강렬한 빛의 대비



골드를 중심으로 한 어두운 색감의 통일, 각각의 색채가 자신의 독립성을 잃고 전체 속에 종속되어 모노크롬 한 느낌을 낸다. 하나의 주도적인 색조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며 바로크의 강렬한 빛을 받은 중심부는 그림 속 순간을 극적으로 만든다. 


렘브란트는 명암법을 사용해 그림 전체를 어둡게 그리고 주요 인물과 사건만 밝게 표현했다. 인물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톤이 풍부한 어둠을 잘 사용한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기법으로 카라바조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하지만 작품에서 빛이 강조된 곳은 한 곳이 아닌 두 곳이다. 렘브란트는 자연의 빛이나 인공의 빛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다. 그냥 렘브란트의 빛을 작품 안에 새겨 넣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외부 통로에는 렘브란트가 [야경]에 사용한 기본 컬러들을 보여주고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P. 카이퍼스 Pierre Cuypers는 [야경]을 중심에 두고 이 미술관을 설계했다.) 


야경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야간이 아닌 대낮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야경]을 그릴 때 황이 포함된 선홍색의 버밀리언(Vermilion)과 납이 포함된 연백(white lead)이라는 색을 사용했다. 그런데 납을 포함한 안료는 황을 만나면 색이 검게 변한다. 이러한 사실은 엑스레이 촬영 등을 통해 현대에 와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림이 검게 변하는 '흑변 현상'은 밀레의 [만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공해가 심해지면서 대기 중의 황상화물이 그림에 영향을 준 것이라 한다.







유대인 신부 the Jewish Bride

1665~1669년경, 캔버스에 오일, 122cm X 167cm



"열흘 내내 딱딱한 빵조각을 유일한 음식으로 삼았지만, 

이 그림 앞에 앉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10년은 행복할 것이다" 


- 1885년 이 작품 앞에서 고흐가 한 말이다.




떨릴 만큼 강렬하다. 붓이 아닌 나이프로 발라 버린 듯 깊은 층을 낸 갈색톤의 황금빛과 주홍빛 물감의 시퀀(sequon) 같은 섬세한 질감 앞에 서면 누구나 고흐의 감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제가 훨씬 고혹적인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순간의 찰나적 표현과 테크닉이 렘브란트가 왜 거장인지에 대해 말해준다. 


정말이다. 어쩔 수 없다.

지면에 인쇄된 저 작품을 한 백만 번쯤 본다고 해서 이 실제를 대면한 순간의 충격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저 섬세한 자수와 레이스의 표현은 직접 보아야지만 느껴질 수 있다. 



이교도적 걸작


[유대인 신부]는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이며 부드러운 윤곽선과는 대조적인 풍부하고 농후한 색감이 특징적이다. 손을 뻗어 저 반짝이는 신성한 '골드'를 만지고 싶다. 평면이 아닌 두껍게 덧칠해진 컬러는 마치 '장식미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신을 닮은 골드 컬러가 한 겹 한 겹 덧대어져 풍성하고 사실적인 질감을 표현해 준다. 


"the Jewish Bride"라는 작품의 제목 때문일까?

남자의 얼굴은 검소한 듯 단호해 보이고 신부는 긴장한 듯 발그레 상기되어 있다.


 






예언자 안나 the Prophetess Anna 

(known as 'Rembrandt's Mother)

1631년, 패널에 유채, 60cm X 48cm



렘브란트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이 작품 앞에서 성경책 위에 놓인 노파의 애처로운 손주름에 서러움을 느꼈다. 이토록 자신의 온 삶을 신께 바친다. 신...., 삶의 인고와 신으로 향한 신실함이 느껴지는 성서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예언자 안나]는 연장자의 지혜와 도덕에 대해 시사한다.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1630년, 패널에 유채, 58cm X 46cm



렘브란트는 구약성서의 예례미아서 32장에 적힌 것처럼, 자신이 예언했던 바대로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며 슬픔에 젖은 선지자의 모습을 음울한 감정으로 표현하였다. 옷의 자수 문양과 자주색 융단의 장식, 선지자의 고뇌를 한 층 더 격렬하게 하는 빛, 빛, 빛......

'내면의 빛', '렘브란트의 빛'


렘브란트는 나이프로 물감을 찍어 바르며, 때론 붓의 나무 손잡이로 물감을 긁어내며, 이 모든 시각적 촉각적 통각적 심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2차원 평면 그림에서의 질감이란 게 얼마나 매혹적인지.

손을 뻗어 저 황금빛 자수를 내 촉각으로 느껴보고 싶다. 그러면 저 금색이 바스락거리며 내 손가락 사이로 거친 색가루로 변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자화상 self-portrait

1628-1629년, 패널에 유채, 22.6cm X 18.7cm



자화상은 자기 자신의 본질과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회화 장르의 하나이다. 

스물두 살 무렵 자신을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이데아적 이상'에 닿고 싶어 하는 렘브란트 자신의 고민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또한 빛의 힘이겠지. 렘브란트의 빛이 가지는 힘.





성 바울의 모습을 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Apostle Paul

1661년, 캔버스에 오일, 91cm X 77cm



성경의 인물인 사도바울의 모습으로 표현한 55세의 렘브란트에게서 세찬 세월을 견뎌내고 자기 자신의 오롯한 본모습을 찾아낸 한 예술가의 당당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렇듯 예술은 오브제가 아닌, 심상에 깃들어 있다.









이제, 렘브란트의 저 깊은 심연에서 흘러나온 오랜 사유와 깊은 성찰의 갈색톤 바로크 빛에서 베르메르(페르메이르)의 울트라 마린이 가진 고요한 빛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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