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남한테 못된 말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해서, 친구들에게 남에게 맞춰주는 것이 내 삶의 방식인 사람이고
장점이 '잘 참는' 것인 사람이다.
어릴 때는 '착함'이 내 자랑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착하다고 좋아해 주었고, 1학기에 인기를 사로잡는 친구들이 2학기 되어 다른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지고 나면 묵묵한 내가 친구가 되어 인연을 오래 이어 나갔다.
그래서 착함은 내 무기이자 내 자랑이었다.
하지만 20대가 지날 즈음이었던가,
착하면 호구가 된다든지, 결국 못된 사람이, 못된 여자가 잘 산다던지, 참고 있던 감정을 쌓아두면 안 된다던지,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서 나의 '착함'은 콤플렉스가 되었다.
'착함'이 나의 무기였지만, 나를 공격하는 이들에 대해 맞서지 못해서 그저 당하거나 참았던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는 내가 못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도 시원하게 맞받아치고 싶지만, 그 순간 얼어버리기 때문에 밤에서야 이불킥을 차며 '이렇게 말할걸!!' 하고 후회하는 스타일이었다.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착함에 대해 나는 바꾸고 싶었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릴 때보다는 거절하고, 가끔 맞받아치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기도 했으나 비굴하게도 나보다 약한 상대인 나의 아들이나 나의 고양이 앞에서, 어린 나의 학생들에게 가장 강하게 굴었고, 때로 용기 내어 남편, 시부모님, 직장 상사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뿌듯해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너는 참 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속 빨간 버튼이 눌리는 것 같았다. 발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예민해졌다. '착하다'는 말은 더 이상 나에게 칭찬이 아니었고, 나를 비꼬거나 욕하는 것으로 들렸다.
내 직업이 교사인데
'우리 선생님 진짜 착해'라는 말은 학생이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들렸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그래~~.'
라는 동료교사의 말은 선생이 너무 물러서 애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엄마가 너무 착해서 애가 말을 안 듣는다."
남편이 퇴사했단 얘기를 동네 친구에게 했을 때
"자기 너무 착하다"
이중에 칭찬이었던 것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모두 욕으로 들렸고, 강하지 못하게 물러 터진 착한 나 자신이 밉기만 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라는 이야기를 늘 들어오고 말로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였으나, 진짜 와닿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착해서 호구가 되는 나, 착해서 타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고 못나다고 생각했다.
절대 손해보지 않고 희생 따위 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지 못하고 자꾸 호구같이 살아서 억울하고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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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 관련 영화를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영화 '바울'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로마군에게 끔찍한 박해(인간횃불, 콜로세움의 맹수 대 인간 경기 등)를 받으면서도 로마를 떠나지 않으며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영화에 등장했다.
그들은 참고 참다가 어린아이까지 잔인한 죽임을 당하자 똑같이 로마 군인들에게 보복하자는 이들이 나왔고, 그때 바울이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자랑을 하지 않고 교만치 아니하며
무례를 안 행하면서 악을 멀리 한다네
사랑은 겸손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싫어하고
모든 걸 바라지만 모든 걸 견뎌내면서
기뻐하는 진리라"
예전에 듣던 익숙한 노래 멜로디가 떠오르며
잘 참는 내 성격이 종종 억울했던 나는 눈물이 났다. 참고 살라는 것이 성경 말씀이라니..
그리고 나는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참은 이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나중에 결국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데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하고 찾아보니, 그리스도 인들은 박해를 주는 대로 받았다. 어차피 오래 살면서 아프고 병들어 죽느니 하느님을 알리며 기쁘게 죽겠다며 계속 죽어나갔다.
문란하고 잔인한 로마문화 속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며 로마인들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 계속 죽어 나갔다.
그리고 몇 백 년 뒤 박해에 박해를 가해도 그리스도인이 점차 늘어났고, 결국 로마 인구의 80%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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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참으며 살았던 나.
참고 싶어서 참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아서 참으로 억울했지만
나의 그 '잘 참는'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사였다.
원수가 뺨을 때리면 맞서는 게 아니라 반대뺨을 대라는, 도둑이 뭘 달라하면 다른 것도 주라는 손해 보는 삶을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며 살고 있었다.
성경에서 참으며 살아가라는데 나는 이미 잘 참는 사람이며 손해도 보고 있으니 그게 은사가 아닌가.
호구처럼 '착한'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가장 힘이 있었다.
이제 달라진 점은,
나는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손해 보며 착한 척하며 산다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착한 마음'을 성경 말씀대로 마음껏 활용하며 당당하게 착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변화가 있은 후로,
"자기는 너무 착해'
라는 동네 엄마의 말도
'선생님은 너무 착해요'
라는 동료 교사의 말도
'우리 선생님 엄청 착해'
라는 말도 다 자랑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요새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돼버린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답을 알 수 없었는데
답의 실마리 하나는,
꽁꽁 숨어서 안 착한 척하고 있는
착한 바보 사람들에게 있다.
"착한 사람들이여 돌아오세요!
당신의 착함을 이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