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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Feb 04. 2023

일어-나-가라

당신을 매혹하는 것은 무엇인가

황금 복숭아를 보며 눈을 뜬 아침 

대리석 주랑을 걸어오는 인물, 앞쪽으로 놓인 접시

황금빛 샤워인 듯 찰나적으로 완성되던 복숭아

여태 가짜로 산 것 같은 느낌이 톡! 

허물이 후르르 낡은 겨울옷이 벗겨진다 

쓰고 버린 것들의 무게가 빠진다

내 일부가 없어졌는데 기쁘다 

홀가분      


대성당으로 달려가니 미사는 끝나고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이 모든 창을 열어젖힌다 

피에타를 보자 다시 눈물이 찔끔 

칠조차 벗겨진 엉성한 피에타가 내게는 걸작이다 

목을 빼고 까치발로 성모의 얼굴을 다시 본다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3년을 나를 안고 언덕길 병원길을 오가며 

얼마나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     


미켈란젤로의 성모가 다시 떠오른다 

뭔가 돌이킬 수 없게 어긋난 느낌 

무의미에 가까운 초월적 표정은 순명이었던가 

성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장난치다 다친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면 좋으련만


몸의 엄마는 자식을 보내며 말한다 

일어--가라 


어머니 아버지 하늘님 

자비를 베푸소서      


꼭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느냐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바로 의미를 찾고 싶다는 자신의 대답이자 결심이다. 특히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까닭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에 형태를 부여한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과 우리는 서로 말을 걸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미없음이 다른 누구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인 다름이며 질적이 아니라 양적이다.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의미가 포함하고 있는 무의미를 받아들이는 일, 의미가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이 바로 다른 곳으로의 이행이며 사는 일 자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코바늘 하나만큼 나를 뜬 거다. 풀리면 또 뜬다. 변화는 쉬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엄청난 보이지 않음을 몸은 안다. 주로 고독과 함께 있을 때 열리며 정동으로 드러난다. 늘 소란 가운데 있거나 느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겐 ‘없는’ 것. 사물들은, 안팎의 대상들은 끊임없이 다가와 우리를 건드리지만 우리는 모른다. 그것들은 언제나 살아 있다. 내가 원하여 내게 보여지기를 재촉한다.   

   

그리하여 이미 응시하고 있던 대상이 나를 부른다. ‘소환되고 사로잡혀야’ 한다. 그렇게 고정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자리를 박차고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나를 외쳐 불러왔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나는 이미 난 길로만 걷는다. 모방과 반응으로 굴러가는 익숙한 길에서는 낯익은 고통이 오히려 편안하다. 길이 막혔음을 깨달을 때는 주로 너무 늦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서 뒤엎는 사람들이 있다. 

가눌 수 없는 불안과 떨림을 용기로 

바꾸어내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그렇게 다진 자리를 딛고 도약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도 있다 

분수에 맞는 포기와 안정 추구 

책임질 일 없이 순종하는 삶도 있다

새길을 뚫거나 날아보고 싶지 않다

방황과 표류, 흔들림과 길 잃기는 오직 두렵다


무엇이 당신의 생각을 움직이는가

누가 명령하고 요구하는가 

당신이 신의 자리에 놓고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진정 매혹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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