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번의 정오를 보낸 그림자
새로 깐 하얀 리넨 식탁보에 팔이 닿는 느낌이 참 좋다. 마지막 아침을 먹고 홍차를 마신다, 붉은 갈색의 신뢰. 절룩이면서 음식을 담는 곱추 남자의 접시, 출렁이는 음료수 잔이 눈에 들어온다. 중력에 대응하는 그만의 몸의 흐름이 있음을 깨닫고 걱정을 멈춘다. 동행자도 그를 굳이 돕지 않음을 눈치챈다. 들어올 때 그랬듯이 나갈 때도 아내로 보이는 여인은 아주 조금 앞서 갔다.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그들은 함께였다. 이런! 남자의 움직임이 점점 인간 몸의 또다른 운동성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생각되어 갈 때 나는 놀랄 수밖에. 느닷없는 감동이 주는 힘으로 찻잔을 내려놓는다. 다림질된 도톰한 식탁보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빵가루 몇 개가 웃어준다.
잘 다림질된 새하얀 리넨 식탁보. 정말 오랫동안 타령만 했을 뿐, 마당에 그것을 멋드러지게 펴고 가족들을 불러 모은 적은 없다. 그러다 얼마 전 상쾌하게 한 방 먹었더랬다.* 완벽하지 못한 책 한 권은 태어나려는 중이었지만 산티아고 순례 타령 역시 10년도 훨씬 넘었을 때였다. 그놈의 리넨 식탁보는 내게 무슨 의미일까. 집에 가면 하얀 비닐이라도 깔고 둘러앉아 짜장면부터 먹어야지. 씩씩하게 올라와 방을 정리한다. 끄덕끄덕 미소로 짐을 챙기고 일찍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이동. 대합실의 널찍한 소파에 편안히 몸을 묻고 책을 편다.
“오늘 갑자기 내가 느낀 피곤함 말이다. 나는 피곤할 뿐만 아니라 애통하기도 하지만 그 애통의 원인도 모른다. 너무 괴로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압박하는 눈물이,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영혼이 아파서 나오는 눈물 말이다.
나는 경험하지 않은 채 많은 것을 경험했다. 생각하지 않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이행하지 않은 폭력의 세계, 조용히 지나간 모험의 세계가 나를 압박한다. 결코 소유한 적이 없었던 것, 그리고 앞으로도 소유하지 않을 것 때문에 나는 피곤하다. 늘 존재하기 직전의 신들 때문에 피곤하다. 나는 내가 회피했던 모든 전쟁의 부상을 몸에 간직하고 있다. 나의 육신은 내가 결코 생각한 적이 없었던 노력 때문에 통증을 느낀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최승자역. 까치. 113ㅉ)
엄청난 문장들이다!
이행하지 못했던 실천, 도전과 모험들
폭력과 위험의 세계로 들어서지 못했음에도
나는 정말 피곤했으니
자신감 없음, 의존하고 싶음, 비난과
시기심, 체념과 죄책감의 자기 전쟁
괴물들과 싸워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부상만 새겨져 아팠다
화가 난다 분개한다
‘분개’가 나를 간질인다
죽음이라는 사건의 고독을 견뎠으나
분개만 하고 있는 나에게 분개한다
누군가는 신들gods을 만들어내는데
신God에 복종하면서도 까불까불 놀며 즐기는데
존재하기 직전의 신들 때문에 피곤했던 나
피곤하기만 하지 않을 테다, 더욱이
자잘하거나 혹은 찌질한 신들 때문에
분개만 하지는 않을 테다
드디어 내 그림자와 하나가 된 것 같다
내 발에서 갈라져 언제나 남을 향하는 그것
나를 나이게 하면서도 나를 배반하는 a
오직 내 편의 고통이며 낭만이었던 그림자
그것 없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내것들
이만 번의 정오를 따로 같이 보내고서야
내 그림자를 만났고 사랑을 연습한다
완전히 겹쳤다, 사랑을 연습한다 만세!
불안이 쓴 책을 신나게 읽는다
불안이 나를 쓰지 못한다
나만의 중력을 획득한다
내가 쓴다
*내가 할 수 있는 20분간의 산책이 내가 좀처럼 하지 않는 7킬로미터 달리기보다 낫지요. 세상에 출간된 불완전한 책이 내 컴퓨터를 떠나지 못하는 완벽한 책보다 낫고요. 테이크아웃 중국음식으로 여는 디너파티가 내가 한 번도 마련하지 못한 근사한 저녁식사보다 낫잖아요. (브레네 브라운 『마음가면 Daring greatly』 안진이역. 더퀘스트. 171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