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대는 기쁨, 단순한 기적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동네가 필요하다면 어른이 되기까지는 온 세상이 도와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60년짜리 사람 하나 만드는데 수많은 그림과 미술관이 불려나왔으니까요. 아이로 머물지 않고 제 몫을 살며 더디게 자신을 알기까지 세상의 모든 빛들이 필요했나 봅니다. 그림은 내 삶의 디딤돌이자 마디마디 생의 직조를 가능케 한 점들이었습니다. 사건과 감정, 생각들을 잇고 연결해 준 숲속의 쉼터이며 계곡의 흔들다리이기도 했지요. 그 점들 덕분에 사람 하나, 내 생을 직조하며 형상을 만들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림의 말들, 문학과 음악, 만화와 영화, 건축이며 조각의 말들이 나를 빚었습니다. 예술에 매혹당한 덕분에 불안쟁이는 살아갈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상처를 통해 촘촘히 연결된 남들 덕분에 좀더 가능했습니다. 친구이자 스승들, 내가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또 다른 나들이었습니다. 아픔 없는 삶이 있을까요. 서로의 상처를 통하지 않고는 너무나 투명해서 더불어 살기 어려울 터, 근원적으로 인간은 상처 입은 존재이며 고통만이 자신의 창조를 가능케 한다고 믿습니다. 자기분석 보고서에 가까운 이 표류기는 삶을 사랑하지 않고는, 인간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혼돈의 기록입니다. 숨길 수 없이 찰랑대는 기쁨은 이미 내가 옮긴 자리, 작으나 큰 변화에서 솟는 샘물입니다.
변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내면의 질서를 조금씩 부수어 새로 만들고 바꾸어가는 순간들의 지속입니다. 자신을 향한 걷기이자 이행移行. 그렇게 자신을 흔들며 거듭 빼고 더하는 시간의 흐름, 그 변화과정이 바로 '삶'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그 움직임을 따라 타자의 흔들림을 인식하게 될 때, 내가 중심인 줄 알았던 구멍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빛들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소우주의 중심을 고집하며 자신에게 압도당하거나 남의 빛에 취하여 자신을 덜 죽이는 삶, 자기로 사는 삶 말입니다.
그렇게 나에게로 갈수록 사물과 현상이 달리 보이고 더 자주 나를 잊을 수 있게 될 때 참 신기했습니다. 잊히는 나의 자리에 다른 사람과 다른 사물들이 오니 더욱 놀라웠답니다. 이것은 응시로부터의 해방, 비난하고 명령하는 목소리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고요한 집중, 기쁨으로 혼자 있을 수 있는 힘, 아무렇지도 않게 게으를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뭘 해도 걸리적거림이 덜하고 힘이 덜 든다고 할까요. 내가 나를 사는 것 같다는 표현도 좋겠습니다.
그러니 과정으로서의 미소한 변화는 어마어마함의 다른 이름, 혁명이고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내 안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으니까요. 메시아가 와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테니까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의 과정에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변화를 원했는지를 알지 못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변화가 아닐 뿐.
그러니 어쩌면 나는 갚을 수 없는 빚까지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상속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 표류기를 통해 그 빚을 조금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a와 재미나게 그림자밟기를 할 수만 있다면요. 혹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한 건 아닐까요.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할 때, 무엇을 하지 않고도 삶이 흐뭇할 수 있어야 할 때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년 2월 7일 박경이
* a를 찾아서 여기까지 함께 와 주신 분들 덕분에 오늘 내 서명이 가능했습니다. 넉 달 동안 매일, 읽기 편하지 않은 이 글들을 낱낱 읽으셨다면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일으킬 힘을 가진 분들입니다.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