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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Feb 22. 2024

영어는 나와 무관했다

1. 서로를 길들이는 시간- 진짜영국영어? 


한밤에 깨어 잠을 잇지 못할 때가 잦았다. 막상 일어나면 책은커녕 머릿속이 엉겨 눈조차 뜨기 힘든 상태. 누우면 다시 멀어지는 잠, 술래잡기. 그날 새벽에는 라디오,가 떠올랐다. 그래, 아무거나 듣자. 한참 지지직거리다가 잡히는 명료한 소리-영어. 또박또박 끊기지 않고 발음되는 영어 문장과 그것을 이어주는 우리말. 강약고저를 조절하며 숨도 안 쉬고 반복되는 문장, 여성의 목소리.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긴, 어학은 반복만이 살길. 졸음 가운데로 영국 발음처럼 여겨지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스며든다. 흉내내고 싶다. 듣고 싶게 만든다. 그의 발음을 좇아가고 싶다. 솔솔 귀를 간질이며 유혹한다. 이상하다, 나 반복 정말 못견디는데, 싫어하는데... 아무튼 이제 새벽에 깨도 괜찮겠구나. 이걸 들으면 되겠구나. EBS, 교육방송? 권주현의 진짜영국영어였다.  

    

이후 종종 불규칙적으로 듣다 잠들고 다시 깨면서 이것을 들었고 점차 다른 영어강좌들도 고루 맛보게 되었다. 진작 들었으면 좋았겠구나! 각기 특징을 내보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던 강좌들. 8시에 ‘Morning Special’을 처음 듣게 된 날의 놀라움은 컸다. ‘죽이는’ 목소리다! 이렇게 편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명료한 발음이 있나... 게다가 품위있는 목소리, 질리지 않는다. 나도 이렇게 영어를 읽고 싶다! 훔치고 싶은 목소리. 어이없는 부러움의 촉발, 얼떨떨.     

 

다른 세상을 향한 설렘으로 중1 때 만난 영어. 발랄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첫외국어로서 야릇한 친밀감은 가지고 있으나 나와 무관했던 ‘영어공부’. 회화는 특히 그랬다. 직장을 떠난 후에도 사전을 찾아가며 더듬더듬 영어본 소설이나 필요한 서적을 해석하는 재미를 누려 왔을 뿐, 본격 배움을 원했던 적은 없었다. 외국여행에서도 혼자 밥 먹고 미술관 가는 길만 알면 족했다. 스치는 사람들과 몇 마디 어눌하지만 밝은 인사로 충분했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뻔한 일상의 대화가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런 영어가 갑자기 어떤 형체를 지니고 내 앞으로 쑥 들어오더니 내 일상에 제 자리를 잡아버렸다. 대여섯 달 이후 나는 딱히 원한 적 없던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5시 40분에 시작하는 진짜영국영어부터 8시 Morning Special까지 눈과 뇌를 반짝이며 듣고 쓰는 기쁨. 놓치면 재방송이 있으니 얼마나 좋던지. 은근히 신나고 재미진 시간들. 그렇게 새로운 일상의 기둥 하나를 세운지 2년 반. 이제 영어,라는 언어를 조금 제대로 알겠다. 말맛을 느끼며 귀도 입도 편안해졌다. 단어들의 껍데기를 훑으며 맴돌던 자리를 벗어나 영어라는 세상을 느끼며 진짜 친해지는 중. 영어의 갖은 배신과 변덕을 참으며 나름의 묘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살금살금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오래된 새친구 영어와 계속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다, 기꺼이 내어주는 시간. 서로를 길들이는 시간. 뭐든 하나를 제대로 알려면 기본 3년이며, 일가를 이루려면 10년이라는 말뜻을 한 겹 더 또렷이 새기게 되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더니. 슬슬 잘 미치고 싶다. 

     

재수 좋게 영어의 싹을 제대로 틔운 나-지진아, 밥그릇에 왕건이 하나가 풍덩, 사는 재미 하나가 더해졌다. 기쁘다. 흐흐, 그러고 보면 나도 속마음으로는 ‘제대로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던가 보다. 이런저런 갖은 핑계로 거부하고 평가절하하며 미뤘지만 말이다. 엄두가 안나서 모른 척했을 뿐? 친절하지 않은 영어에 화가 났던 걸지도. 신기하다, 방송을 들으면서 속으로는 웅얼거릴지라도 입은 결코 열리지 않더니 갈수록 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우리말과 자연스레 교환되는 의미의 흐름을 따라 읽어가며 영어,의 가능성이 힐끔힐끔 보일 때 참 좋았다. 내 입술로 소리내며 영어를 느낄 때 정말 신났더랬다. 이제 영어와 함께 갈 나만의 길이 보인다 싶으니 서두르고 싶지도 않다. 방향이 확실하니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방향이랄 것도 없고 목표랄 것도 없다. 그냥 영어랑 손잡고 이야기하며 걷는다. 재미있다.  


영어의 입이 살금살금 열리니 손끝도 간질간질, EBS 영어강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르치는 분들과 EBS를 존중하고 감사하며 조용히 경청하던 자세에 경험적 비평을 더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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