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타월을 팔던 당신에게
당신의 타월 한 장만을 따로 세탁할 수는 없었어요. 다른 타월 한 장, 연한 색의 양말과 함께 세탁기를 돌렸지요. 살살 펴서 널 때도 기분 좋았고 갤 때도 보송보송 좋았답니다. 약속을 지킨 것 같았거든요. 얼마 후, 세탁기 안의 빨랫감들 가운데서 그 타월을 보았을 때 나는 또 잠시 망설였어요. 다른 것들을 꺼낸 다음 그것만 빨았지요, 연녹색 꽃무늬 타월. 비껴드는 햇살 속에서 가만히 혼자 웃는데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없었어요. 맡은 일을 완수한 듯 뿌듯한데 당신의 선하고 밝은 웃음소리도 들리던걸요.
렌틸수프에 쓸 큐민을 사러 갔던 거였어요. 작은아이를 기다리며 매장을 구경하던 중이었지요. 마침 타월이 눈에 띄었고 큰아이는 벌써 만지고 있었어요. 이거 좋다, 엄마, 나 한 장 살래. 그래, 크기도 무늬도 퍽 괜찮네. 세 장을 샀죠. 동생은 모를테니 싼 걸로 사주자,는 큰아이의 말에 킬킬거리면서요. 산뜻하게 인쇄된 설명서를 주면서 당신은 말했어요. 이번에 새로 기획한 제품이다, 번거롭더라도 꼭 처음 두세 번은 단독세탁을 부탁한다. 그래야 색상과 무늬와 질감이 그대로 지속된다. 건성으로 네~, 미소지으며 돌아설 때, “저, 고객님.” 분명 어떤 망설임이 묻은 말, 나는 몸을 돌렸지요. “한 번이라도 꼭 단독세탁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게요~
당신의 표정은 꽤 진지했어요. 간곡함이 느껴지는 진심에 나는 화답하고 싶었으니 당신은 타월을 팔기만 한 게 아니라 제대로 판 거예요. 계약된 일, 맡은 일을 잘함으로써 스스로의 약속을 지킨 거죠. 성실함,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일 거예요. 타월 한 장을 단독 세탁하라니, 대충 쓰면 되지 무슨 물낭비야. 기꺼이 내 생각을 내던지고 당신의 목소리를 따랐던 거죠. 그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그럴 수 있어서 기뻐요. 큰아이도 한 번 그렇게 빨았다더군요, 그러고 싶더라고. 우리 마음을 모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제 그건 나에게 특별한 타월이 되었답니다. 어린 왕자와 장미, 여우 만큼은 아닐지라도.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당신도 라디오를 듣나요? 열어놓은 귀로 온 세상을 고루 담으며 생의 감사에 둘러싸일 때가 있나요? 나는 당신이 라디오를 들으며 깊고 밝게 세상을 그려내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상상할 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게 무한을 유한으로 쪼갠 시간 하나에 일상의 깃발을 꽂으며 뚜벅뚜벅 걷는 정직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만났습니다. 아무런 부러움 없이 자신의 힘찬 반복으로 소소한 기쁨을 길어올리고 나누는. 안달박달도 하지 않고 시기심도 없이 제 몫에 만족하는 사람들, 반짝반짝 세상의 토대와 근간을 이루는 몸맘 건강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이들을 이길 수는 없지요. 진정 지구를 지키는 사람들, 확실하고 영원한 승자!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위대함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 감사...
감사...
EBS라디오 영어강좌 진행자들께 감사한다. 덕분에 낡은 그물코를 잇고 새로 뜨며 영어의 바다로 떠날 수 있었다. 익명의 동학자들, 무언의 지지를 입고 맘껏 놀았으니 참 고맙다. 까불까불 따라하고 소리내어 읽는 재미. 알알이 다가와 빛처럼 스며들며 내것이 되어가던 남의 말, 뿜어내는 기쁨. 내가 원하여 내게 알맞은 것들로 맞춤하게 채우는 하루. 땀땀이 마디게 엮으며 만들어가는 나의 시간들. 영어와 술래잡기하듯 듣고 쓰는 내내 넓어지던 가슴, 충만감... 공책과 두툼한 연습장들, 나를 먹인 마르지 않는 샘이자 곳간.
보이지 않는 손들, 제작진에게 감사한다. 덕분에 뜬금없이 영어에 풍덩 빠져볼 수 있었다. 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하는 일. 남들이 ‘열심히’라고 말할 때, 그때 우리는 사실 미친 거다. 아무런 이유나 변명, 수식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상태, ‘리비도 집중’! 미쳐 있는 당시에는 모른다. 지난 다음에야 깨달음으로 온다. 잘 미칠수록 병으로 가지 않으며 있던 병도 힘으로 돌려 쓴다. 마침내 어느 경지에서 일가를 이룬다. 미친 줄 알면서도 더 미칠 줄 아는 것, 그건 능력이다. 맘껏 자신을 벼리고 부려쓰는 힘. 아름다운 병리이자 광기, 고통인 동시에 쾌락. 섹스를 능가하는 섹스, 공부. 안팎으로 확장되는 사랑!
나-빌빌이는 3년이 한계. 내가 얻은 것이 만져질 듯 분명히 알아챌 만큼만 미칠 수 있다. 더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폭력적 열정'에 이를 에너지가 없다. 나 하나 가만히 흔들어서 조금 바꿀 정도. 충분히 즐겼다 싶을 때 빠져나오기, ‘리비도 회수'! 그냥 순하게 살살 즐기기. 평화로이 흐르듯 살기. 빌빌이 느림보라도 좋고 못난이 오종종이어도 어쩔 수 없다. 랄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