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태규 Jul 15. 2024

서평 : 민중을 위한 역사가 진짜 역사다.

주진오, 역사가, 역사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역사와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리라. 또한 이 물음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대답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아마 역사학자의 숫자만큼 역사의 정의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는, 질문과 똑같은 제목의 책을 쓴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가 내린 것이다. 그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말했다. 인류의 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한 아널드 토인비의 정의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답은 많은 데 비해,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역사가 중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찾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발적 질문을 책으로 펴낸 역사가가 있다.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포북출판사, 장 세노 지음, 주진오 옮김, 2023년 5월)라는 책을 쓴 프랑스 역사가 장 세노(1922~2007)다. 그는 프랑스 역사학자로서 최초로 중국과 베트남 현대사를 전공한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이 책을 번역한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명예 교수도 한국에서 유명한 진보 성향의 실천적인 역사가다. 


이 책은 읽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다른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반납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갑자기 읽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저자는 잘 모르지만, 번역자가 박근혜 정권 때 국정 교과서 저지의 선봉장 노릇을 한 주 교수였기에 더욱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역자 서문을 읽어 보니, 1985년에 이미 <실천을 위한 역사학(원제, Pasts and Futures or What is history for?)>으로 번역 출간했던 것을 38년 만에 전면 개정판으로 내면서 제목을 지금처럼 바꿨다.


저자는 서장을 포함해, 자신의 관심사 19개를 각 장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서장 다음에 나오는 19개의 장은 시대 순, 또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것이 아니므로 독자가 흥미와 관심이 있는 장부터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장을 먼저 밝히자면, '역사는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현실 변혁의 실천을 돕는 학문이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를 없애버릴 것이가'라는 제목을 단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만 내맡겨지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또 이 책은 역사학자로서 '자아비판적인 책'이라고 밝혔다. 이런 표현에서 민중을 위한 역사를 하지 않고 기존 학계의 타성에 젖어 있는 역사학계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나오는 문장 중 내 눈에 띈 것을, 대략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으며, 결코 분쟁을 초월해 존재할 수도 없다. 주요 쟁점을 규정하고 요구를 제시하는 것은 바로 현실이다."(43쪽)


"국가와 권력 구조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따라 과거를 짜 맞추고 그 이미지를 정립한다."(50쪽)


"세계사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알아도 좋다고 허용한 것 외에 어떤 다른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57쪽) 


"사학사, 즉 역사학의 역사가 갖는 참된 기능은 역사 지식과 지배적인 생산양식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밝혀내고 서술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전문적인 역사가들은 거의 없다."(65쪽)


"과거와 현재의 능동적인 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 연구이다."(92쪽)


"과거에 대한 현실의 우위성은, 우리는 오직 현실 속에서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어른의 모습을 통해서 어린이를 이해하고,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원숭이를 이해한다는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사고를 다시 상기해 보면,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어른이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역사 지식의 목적은 실제적 행동이며 투쟁이다."(102쪽)


"전문가주의, 기술주의, 극도의 주지주의, 생산주의 등 이들 모두가 기성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가치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데 한몫을 한다. 역사가의 수사법은 대중과 전문가 사이의 틈을 심화시킬 뿐이다."(125쪽)


"이론적으로 아무리 정교한 것일지라도 세계사는 하나의 담론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162쪽)


"역사는 할머니와 같다. 할머니는 제일 어린 손자를 가장 사랑하신다. 그녀는 막내에게 뼈가 아니라, 서구 유럽이 남을 파괴하려다 다쳤던 손가락뼈의 골수를 준다."(253쪽)


"과거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성찰은 대중의 투쟁 및 혁명 전략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학술적 역사가들이 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학을 떠나야만 한다."(293쪽)


책 전체를 통해 위 문장에 담겨 있는 그의 철학과 주장이 변주를 하며 되풀이된다. 그는 서구의 부르주아 역사학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공식 역사도 민중을 위한 역사학, 변혁을 위한 역사학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안토니오 그람시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며 '혁명을 위한 역사 탐구'의 길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지식인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리인이며 '낡은 역사 진영'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도권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낡은 이데올로기와 결별하고 '새로운 역사 진영'에 참가하여 '유기적 지식인'이 되는 것이 그의 의무다."


그는 결론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우리 자신을 '유기적'으로 민중의 투쟁에 수렴시키고, 그러한 투쟁을 통하여 착취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기초 위에서 서구의 사회주의를 창조하는 과업에 참여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공산당 활동, 레지스탕스 참가, 베트남 독립운동 지원, 68혁명 지지 등 프랑스 현대사의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살아왔던 한 실천적 진보 지식인의 외침은, 아직도 부자 중심· 권력자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도 큰 울림을 준다.

작가의 이전글 나토 참석으로 안보 강화? 윤석열의 위험한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