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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Nov 18. 2024

서평 : 한국 민족주의의 두 얼굴, 선인가 악인가.

<전통, 근대, 탈근대>, 이정우, 철학, 정약용

어떤 책은 술술 읽히지만, 어떤 책은 한 문장을 고이 넘기기도 힘든 경우가 있다. 글이 난삽해서 그렇다면 작가 탓이라도 하겠지만, 잘 정제된 문장의 글인데도 그렇다면 읽는 사람의 능력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런 책은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면서 읽기를 포기하든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며 인내력 시험을 벌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이런 책을 만났을 때 주로 하는 선택은 우직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막판까지 밀고 가다 보면 뭐 하나라도 건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전통, 근대, 탈근대-탈주와 회귀 사이에서>(그린비, 이정우 지음, 2011년 4월)가 바로 그런 책이다. 서강대에서 교수 생활(1995~98년)을 잠시 하다가 거리로 나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 이정우씨가 쓴 책이다. 제목부터 묵직하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좀 엉뚱하다. 다른 책을 읽던 중 한국 민족주의에 관한 글이 이 책에 들어 있다고 해서 찾아보게 됐다. 민족주의는 방향성이 없어 악으로도 선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데,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나온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라는 평가가  실려 있다길래 원 출처를 따라갔다.

막상 책을 펼쳐 보니 민족주의 얘기는 이 책에 곁가지로 끼어 있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6개의 보론 중에 '한국 민족주의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필자는 여기서 한국 민족주의의 외연(역사적 과정으로서 외연)을 다섯 가지로 규정했다. ⑴ 한국에 있어 '근대적' 맥락에서의 민족주의는 구한말 외세의 침입이라는 외환을 통해 서서히 형성됐다. ⑵ 일제 강점을 통해 민족주의는 한국인 일반의 감정으로 자리 잡았으며,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더불어 이념적 삼각구도를 형성했다. ⑶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이념 및 국가이성과 결부되기 시작했고 저항적 민족주의 정신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⑷ 군정 시절 민족주의는 파시즘 정권에 의해 번번이 이용당하곤 했다. 민족주의는 개발독재와 결부됐다. 그러나 동시에 파시즘 정권과 투쟁했던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 이념을 견지했다. 민족주의의 악용과 선용을 구분해야 한다. ⑸ 1987년 군정 종식 이후 민족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필자는 이승만 시대에 민족주의를 정권 유지의 도구로 활용하게 도운 학자로 안호상씨를, 박정희 시대에는 박종홍씨를 꼽았다. 안씨에 관해서는 '독일에서 헤겔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사유는 유치'했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영남 출신인 그가 한국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출신인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출신만을 선호했다고 꼬집었다. 바로 그가 '해방 이후 지역/연고 차별의 원조'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지역 차별 원조하면 박정희 시대의 이효상씨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안호상이 단군을 끌어들여 신비주의적 역사철학을 전개했다면, 박종홍은 본격적인 개발 독재시대에 걸맞은 근대적 사상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박종홍이 박정희 독재 정권 시대에 강조한 "창조의 논리, 개조의 논리는 국민교육헌장, 새마을운동, 유신헌법 등 박정희가 추진한 독재 정치에 지적인 액세서리로 기능"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필자는 각주를 통해, 이런 박종홍에 대해 후배들과 제자들이 "선구자"(고형곤), "존경의 대상"(이희승), "태양처럼 빛날…대철인"(최영호), "한국의 스피노자"(최재희), "고결한 일생"(김태길), "우리의 스승"(오기형), "인간 박종홍"(한전숙), "진지한 현실의 창조적 전설"(정용두), "마지막 선비"(최정호) 등의 찬사를 늘어놨다는 기록을 남겨놨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한국의 강단 철학을 주도해 왔고, 그들을 재현하고 있는 자들이 오늘날의 강단 철학을 이끌고 있다"라고 분개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가 왜 강단에서 그렇게 빨리 거리로 자리를 옮겼는지 짐작이 갔다. 이 책의 변두리의 변두리에 나오는 얘기지만 이런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꼈다.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와 변화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꼭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은 주 내용은 책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전통'과 '근대', '탈근대'라는 틀을 사용해 우리 시대와 현대인의 정체성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부에서는 한국에서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서 있던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의 사상 검토를 통해 근대 이전에 그가 내세웠던 도덕적 주체가 서구의 근대성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살펴본다. 2부에서는 대중자본주의 시대의 '대중'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런 모습을 낳은 역사적 과정으로서 '욕망의 세계사'를 논한다. 그는 다산 사상이 한국에서 '자생적 근대성'의 싹을 틔웠지만,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으로 이  싹이 뭉개지고 서구의 외래적 근대성이 자립 잡게 됐다고 말한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현재(욕망의 세계사 끝에서 형성된 대중자본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회귀(다산의 꿈을 재음미)를 매개해서 다시 탈주로 나아가는 일이다." (247쪽)

우리가 근대를 극복하고 탈근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탈주가 회피가 되지 않으려면, '회귀를 통한 탈주'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리라. 그러고 보니 '온고지신'이란 말과도 통하는 것 같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웅숭깊은 생각을 더욱 자세하게 음미하고 싶은 사람은 나의 천박한 요약이 아니라,  힘이 들더라도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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